김장날은 수육날

1부_김치에 담긴 이야기

by 이수정

"엄마. 김장 이번 주말에 할 거야?"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대뜸 물었다.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김장은 내게는 일 년에 한 번 있는 엄청나게 큰 행사다. 정확히는 김장이 아닌 갓 담근 김장김치와 수육이 목표지만 말이다.


누구에게나 가장 소중한 맛이 있을 것이다. 내겐 엄마의 김치가 소중하다. 이 김치맛은 나의 할머니인 박광자 여사님(이하 광자 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엄마가 결혼했던 초반에는 요리를 잘하지 못했다고 한다. 반면 광자 씨는 정말 음식을 잘했다. 광자 씨의 그 수많은 음식 중에 엄마가 제일 제대로 배웠다고 하는 것이 바로 김치다. 내 기억에 광자 씨는 어떤 음식을 하던 재료를 아끼지 않았다. 근데 김치만큼은 이것저것 많이 넣지 않고 기본적인 재료만 넣었다. 배추, 무, 쪽파, 마늘, 생강, 고춧가루, 찹쌀 풀, 젓갈, 육수. 기본만 들어간 광자 씨의 김치는 늘 깔끔하고 시원했다. 겨울이 지나 봄이 되어 다 시어빠져도 김치 특유의 군내가 나지 않았다.


김치를 담그는 광자 씨 옆에서 무 조각을 주워먹던 내가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김장에 참여할 수 없게 되고, 광자 씨의 허리는 점점 굽어졌다. 김치는 다소 짜지고 이젠 더 이상 그것 조차 맛볼 수 없게 되었지만, 다행히 그 김치맛은 엄마가 물려받았다. 엄마 또한 광자 씨가 그랬듯 기본적인 재료만 사용한다. 어디에 내놔도 자신 있는 그 맛이다.


언젠가 우리 가족과 막내 고모, 막냇삼촌 가족이 다 같이 콘도를 빌려 식사했었다. 모두 엄마의 김치가 맛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눈치 없는 아빠는 "아무리 엄마의 김치가 맛있어도 광자 씨의 김치맛을 못따라간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엄마가 바로 받아쳤다. "너희 엄마한테 가서 김치 담가달라고 해라!"라고. 그날은 광자 씨가 이생에서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간 지 2년째 되던 해였다. 엄마의 일갈을 들은 우리는 박장대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아빠는 삐져서 식사가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엄마의 김치만큼은 계속 맛있게 드셨다.



빠른 주문에는 빠른 배송이 따른다

언제 김장할 거냐는 나의 물음에 엄마는 이번 주말에 할 것이라고 하며 왜 그러냐고 되물으셨다. 나는 당당히 말했다. "수육 먹어야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엄마는 한참을 웃으셨다. 엄마와의 전화 통화를 끊고 나는 바로 쿠* 앱을 켰다. 이번 주말이 김장이라니 늦지 않게 지난번에 봐두었던 우설을 주문해야 했다. 다행히 아직 판매 중이였고 2킬로쯤이면 엄마와 나, 신랑, 아이가 충분히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빠르게 주문했다. 수요일에 주문했으니 김장 날인 토요일 이전엔 도착할 것이다.



잘 익은 배추

우리 집의 김장은 이틀에 걸쳐 진행된다. 큼직한 배추를 손질해 반으로 쪼개니 노랗게 잘 익었다. 쪼개놓은 배추 위로 굵은 천일염을 적당히 뿌리고 절인다. 엄마가 말하는 '적당히' 라는 게 나는 아직도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다. 순전히 엄마의 감각에 맡긴다.



육수와 찹쌀죽

배추가 절여지는 동안 김치 속 준비를 해야 한다. 커다란 냄비에 명태 대가리와 멸치를 넣고 대파, 양파, 사과, 배를 넣고 푹푹 끓여 육수를 만든다. 육수가 우러나오는 동안 쪽파와 무를 썰어놓는다. 올해는 마당 한켠에 심어놓은 갓도 뽑아서 김치 속에 넣기로 했다. 양이 많았다면 따로 갓김치를 담갔겠지만, 그정도의 양은 아니었다. 아쉽지만 직접 기른 채소를 이렇게 쓰니 뿌듯하다.



완성된 김치양념과 김치속재료

다 우러난 육수를 걸러내고 식힌 뒤에 다진 생강과 마늘, 새우젓과 엄마가 직접 만든 전어 액젓, 고춧가루와 식혀둔 찹쌀죽을 넣어 섞어서 하룻밤 재워둔다. 양념이 잘 되었는지 맛보던 엄마는 올해 김장이 맛있게 되겠다며 배추를 세 통이나 더 사 오셔서 급하게 절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낮에 소금을 뿌려 쌓아둔 배추를 위의 것은 밑으로, 밑의 것은 위로 한번 뒤집어준다. 최소 12시간은 절여야 한다. 이렇게 하면 김장 첫날은 마무리가 된다.



잘 절여진 배추

아직 이른 아침이었지만 밖이 부산스러워서 깼다. 무슨 일인가 창문을 열어보니 엄마가 절여둔 배추를 헹구고 있었다. 잠옷 바람으로 눈을 비비며 마당으로 나가 숨이 푹 죽은 배추를 한 조각 떼어 먹었다. 달고 짭짤한게 아주 잘 절여졌다. 내가 배추를 뜯어먹는 사이에 엄마는 김치 양념과 김치 속 재료를 다 버무려 놓았다.



김치를 버무리는 엄마

마당의 평상에 한번 헹군 배추를 쌓아놓고 김치 속을 버무리다 보니, 올여름에 김장할 때 써야겠다며 바다에서 따놨던 청각이 보이지 않는다. 여름에 바닷가에서 해수욕하다가 청각을 발견했었다. 엄마와 나는 김장할 때 쓰려고 크고 실한 것들로만 골라 비닐봉지 한가득 청각을 따두었다. 엄마에게 그때 그 청각은 어디 있냐 물으니, 손질해서 마당에 널어 말려뒀는데 어느 날 바람에 다 날아가고 없어졌다며 속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썹을 늘어뜨리며 속상해하는 엄마가 너무 귀여워서 나는 김치 속을 버무리다 말고 한참을 웃었다.



완성된 김치

김치를 할 때마다 광자 씨의 이야기는 꼭 나오게 된다. 광자 씨가 생전에 '광자씨네' 라는 간판을 걸고 음식점을 했으면 지금쯤 내가 광자씨네 3대째 사장님일 거다! 그랬으면 속초에 건물 하나 정도는 세우지 않았을까? 하는 실없는 농담들을 주고받다 보니 금세 배추가 동이 났다. 총 12포기의 배추. 우리 집은 옛날부터 김치 없이는 밥을 못 먹는 집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아빠가 김치 귀신이었다. 김장철에는 엄마, 아빠, 나, 이렇게 달랑 세 식구인데도 매년 겨울을 보내기 위해 50포기는 해야 했다. 김치, 김치볶음밥, 김치찌개, 김칫국, 김치 볶음, 김치말이 국수 등 김치의 무궁무진한 변신! 그렇게 봄까지 남는 김치 없이 다 먹어 치웠었다. 아빠가 건강했다면 이거 조금 담가서 누구 코에 붙이냐고 잔소리했을 것이다.

오늘따라 아빠의 잔소리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