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_기다림까지 먹는 과일, 수박
짜장면을 먹고 나서, 나는 오래전 여름의 수박을 떠올렸다. 계절은 전혀 맞지 않았지만, 기억은 늘 이런 식이다. 엉뚱한 순간에 전혀 다른 시간을 불러낸다. 나는 과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몇 개의 과일은 좋아한다. 그중 하나가 수박이다.
나의 수박 사랑은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시작했다. 엄마가 임신 중에 유난히 먹고 싶어 했던 것이 바로 수박이었다. 그래서 아빠에게 아침부터 수박 타령을 했다고 한다. 하필이면 그게 1월 한겨울이었다는 게 문제다. 그날 아빠는 조금 일찍 퇴근해서 시장을 돌아다녔다. 87년도의 겨울에 수박이 있을 리 만무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친구들까지 불러 온 동네 시장과 백화점을 뒤졌다. 급기야 지금은 가락동 농수산물 종합 도매시장으로 불리는 가락동 청과물시장까지 찾아갔다.
그렇게 찾고 찾다가, 청과물시장 한구석에서 발견한 초등학생 머리통만 한 작은 수박은 3만 원이나 했다. 그 당시 아빠의 월급이 16만 원이었으니 3만 원짜리 수박은 수박이 아니라 금박에 가까웠다. 그래도 아빠는 임신한 아내가 먹고 싶다고 하는데 못살게 뭐 있겠냐며 수박을 사서 개선장군처럼 집에 돌아왔다. 엄마는 온몸이 꽁꽁 얼어 돌아온 아빠보다 아빠 손에 들린 수박에 눈길이 갔다. 인사는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수박을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수박 꼭지만 잘라내고, 앉은자리에서 숟가락으로 그 수박을 통째로 다 퍼먹었다. 수박이 바닥을 보이자, 엄마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아빠에게 처음에 잘라낸 수박 꼭지를 내밀며 말했다. “오빠도 좀 먹을래...?”임신한 임산부가 먹고 싶은데 남편이 못 사주면 그 일을 평생 얘기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집은 역으로 아빠가 한겨울에 수박을 구해온 이 무용담은 내가 40살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얘기하고 계신다.
신기하게도 엄마는 수박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임신 중에 유난히 먹고 싶었던 수박은, 아마 엄마가 아니라 뱃속의 내가 먹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수박 귀신으로 자랐으니까. 그날은 한여름의 토요일이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땡볕에 땀은 빗방울처럼 쏟아졌다. 그렇게 기다려 겨우 탄 버스에는 에어컨도 없어 뜨끈한 바람만 나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선풍기를 켜고 그 앞에 앉아 땀을 식혔다. 전기밥솥도 없던 집이었으니, 더위를 식혀줄 건 선풍기뿐이었다.
어느 정도 땀이 식고 허기가 진 나는 텔레비전 앞의 오천 원으로 짜장면을 시켜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밖에서 과일 트럭 소리가 들렸다. “수박 세 통에 오천 원! 쌉니다! 싸요!“그 맛있는 수박이 세 통에 오천 원이란다. 내가 수박 세 통을 다 먹을 수 있을까, 잠깐 고민이 됐다. 아무리 내가 수박을 좋아한다지만, 커다란 수박 세 통을 다 먹을 수는 없다. 그리고 수박을 산다고 오천 원을 다 써버리면 돌아오는 토요일까지 쓸 용돈이 없어진다. 지금이었다면 달려 나가서 한 통에 이천 원에 파는 건 어떻겠냐, 흥정했을 테지만 그때의 나는 숫기 없던 어린아이였다. 자그마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결정했다. 일주일 내내 간식은 수박으로 먹자고. 나는 오천 원을 쥐고 달려 나가 수박 세 통을 샀다. 수박이 무거워 한 통씩 들고 왔다 갔다 하는 일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야, 겨우 집으로 다 들여놓을 수 있었다.
두 통은 고무다라이에 수돗물을 받아 담가두고 한 통은 도마 위로 올렸다. 처음 써보는 칼이였지만 엄마가 했던 것을 기억해 조심스레 칼을 수박에 가져다 댔다. 얼마나 잘 익었는지 별로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쩍하고 벌어지며 새빨간 속살을 드러냈다. 숭덩숭덩 잘라 부엌 바닥에 그대로 앉아 수박을 먹기 시작했다. 달지 않으면 어쩌냐고 하는 고민이 무색하게 수박은 너무 달고 맛있었다. 트럭에 있던 것을 시원하게 식히지도 않고 자른 것이라 뜨뜻미지근한 수박이었지만 너무 맛있었다. 삼각형으로 잘라먹어 보기도 하고, 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기다랗게 잘라 온 얼굴에 수박즙을 묻혀가며 먹어보기도 하고, 그렇게 혼자 수박 반 통을 다 먹었다. 남은 반 통은 냉장고에 밀어 넣어두었다.
맛있게 먹고 나니 쓸데없이 돈을 썼다며 혼나지는 않을까 아주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몇 시간 후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엄마는 세면장의 다라이를 가득 채운 수박 두통과 냉장고에 남아있는 반 통의 수박을 보고 무슨 수박이냐 내게 물었다. 너무 먹고 싶어서 수박을 샀다는 내용뿐이지만, 그것을 사기 위해 갈등한 내 생각과 세 통에 오천 원이면 싼 거라 샀다는 설명을 늘어놓았다. 엄마는 나의 장황한 변명을 다 듣고 난 뒤 웃으시며 말했다. “많이 익어서 상품 가치가 없어져서 싸게 판 거란다. 앞집, 옆집 다 나눠주고 수박 파티해야겠네.”
떠오른 옛 생각에 코끝으로 잘 익은 수박 향이 스쳐 지나갔다. 싱그럽고 달콤한 수박이 먹고 싶어졌다. 요즘은 수박이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마트에 가면 조금 비싸기는 해도 커다란 수박이 진열대에 놓여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수박은 역시 더운 여름날, 땀이 나고 숨이 턱 막히게 더울 때 먹어야 한다. 기다림까지 함께 먹는 과일이니까. 그리고 그때가 되면, 오래전 텔레비전 앞에 놓여있던 오천 원도 함께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