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화가 벌어지던 저녁

내게 굴은 여름음식 이었다.

by 이수정

굴이다. 오늘은 굴이다. 겨울의 별미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오늘은 굴이 먹고 싶다. 실은 우리 집에서 굴은 겨울 별미가 아니라 여름 별미다. 해수욕하며 방파제 테트라포드에 붙어 커다랗게 자란 굴을 그 자리에서 따 먹고, 바위 사이에서 주워 온 성게를 까먹는다. 해수욕하느라 출출한 배를 달래는 데에는 그만한 게 없다. 그렇게 해수욕하며 해산물을 따먹던 건 신랑과 내가 고등학교 친구일 때부터 시작됐다. 그래서 나에게 굴은 여름 음식이다. 그럼에도 겨울에 굴을 찾게 된 이유가 있다.


깨끗하게 닦은 석화

원래 나는 굴을 먹지 못했다. 물컹한 식감부터 찝찔한 비릿한 맛까지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 물컹한 식감이 목을 타고 내려오기도 전에 거부감이 먼저 올라왔다. 처음 굴을 먹으며 맛있다고 느낀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친구들과 함께 해수욕하다 내가 출출하다고 하니, 당시 친구였던 신랑이 잠수해서 검지만 한 굴을 따오며 먹어보라고 했다. 평소에도 굴을 잘 먹지 않던 나였기에 질색했지만, 그래도 따온 성의가 있으니 입에 넣었다가 뱉더라도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질끈 감고 입에 물컹한 굴을 넣고 씹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싱싱한 굴은 꽤 먹을 만했다. 먹을만하다기보다는 맛있었다. 짭짤하고 농후했다. 그날 몇 개 더 따오라는 나의 성화에 신랑은 몇 번이나 자맥질했다. 그 이후로도 몇 번 더 굴을 먹어봤지만, 신랑이 따다 준 굴만큼 맛있지 않아서 그날 내가 배가 고팠나보다 하고 다시 굴은 나에게 비호감 음식이 되었다. 회사에서 동료들이 점심으로 굴국밥을 먹으러 가자고 할 때마다 굴을 못 먹는다며 나 혼자서라도 다른 것을 먹으러 갈 정도였다.


석화에 편마늘은 필수다.

다시 굴을 먹기 시작한 것은 몇 년쯤 지난 어느 겨울이었다. 친한 언니들과 영등포에 오징어 맛집을 갔다. 오징어회를 시키면 몸통은 회를 썰어주고 다리는 따로 튀겨 오징어튀김으로 만들어주는 가게였는데, 오징어를 좋아하는 내가 종종 가는 곳이었다. 그날도 오징어튀김, 오징어 통 찜, 오징어회 등 갖가지 오징어요리를 시켜 먹고 있었다. 술도 시키고 안주도 잔뜩 시켜서 그랬는지 사장님이 서비스라며 접시 한가득 석화를 가져다주셨다. 나는 먹지도 못하는 걸 줬다며 심통이 나 있었는데 일행이 일단 한번 먹어보라며, 굴 껍질 위에 편 마늘과 초장을 올려 권했다. 호로록 마시기만 하면 돼! 라는 권유로 입에 털어 넣었다. 그 맛은 고등학생 시절 신랑이 나에게 따다 준 굴과 같았다. 그날 서비스로 나온 석화는 내가 다 먹었다. 그 이후로 굴은 내가 겨울에 종종 찾는 음식이 되었다.


통통하고 뽀얀 석화구이

오늘은 숯불에 구운 석화구이가 먹고 싶었다. 추운 날씨였지만 따뜻한 숯불 앞에 앉아 굴을 구워 먹으면 춥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친정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식자재마트에 들려 석화 한 팩과 홍가리비 한 팩, 그리고 실제로는 처음 보는 맛조개 한 팩을 샀다. 모두 살아 움직이는게 싱싱해 보였다. 조개를 다 구워 먹고 나면 입가심으로 구워 먹을 마시멜로도 한 봉지 샀다. 신나게 친정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신랑은 화로에 불을 붙이고, 나는 사 온 조개껍질에 붙어있는 이물질들을 씻어냈다. 빨갛게 달아오른 숯불 위에 석쇠를 올리고 씻은 석화를 올렸다. 그대로 잠시 두자, 석화 껍데기 사이에서 거품이 보글 올라오고 앙다문 껍질이 벌어지며 뜨거운 김이 새어 나왔다. 장갑을 끼고 뚜껑 같은 껍질을 뜯어내자, 탱글탱글하고 뽀얗게 익은 굴이 보였다. 김이 올라오는 것이 아직 뜨거워 보였지만, 뜨거운 음식은 뜨거울 때 먹어야 한다는 이상한 고집으로 얼른 초장을 살짝 발라 입으로 밀어 넣었다. 역시나 뜨거워 후하후하 하며 씹었다. 부드럽게 으깨지며 진한 굴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이거지!!

서둘러 캔맥주를 마시며 뜨거워진 입속을 달랬다. 그리고 다시 뜨거운 굴과 시원한 맥주를 번갈아 가며 먹었다.


예쁜 홍가리비

맥주 한 캔과 석화 한 팩을 다 구워 먹고 홍가리비와 맛조개를 석쇠 위에 올렸다. 껍질이 두꺼운 석화와 다르게 홍가리비와 맛조개는 금세 입이 벌어졌다.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맛조개부터 집어 들었다. 맛조개는 굉장히 맛있다고 들어서 부푼 기대를 안고 입에 넣었다. 으득하고 모래가 씹혔다. 찝찔한 바닷물 맛만 났다. 입안에서 씹히는 건 조개가 아니라 실망이었다. 이것만 그럴 줄 알고 다른 것도 입에 넣어봤지만, 모래가 씹히는 건 여전했다. 첫 맛조개 도전은 실패다. 기대했던 조개에 신경을 쓰는 사이, 가리비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조개는 불 앞에서 금세 작아지고 질겨진다. 안 그래도 작은 홍가리비가 더 작아지고 질겨지기 전에 초장에 찍어 입에 넣었다. 관자가 쫄깃하게 씹혔다. 역시 가리비는 배신하지 않는다. 조개의 맛은 담백하지만, 속살의 반을 차지하는 관자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맛있다. 비어 있는 맥주캔을 옆으로 치우고 새로운 캔맥주를 따 홍가리비와 번갈아 가며 먹었다.



마지막 홍가리비를 먹어 치우고 부른 배를 두드리니, 옆에서 아들이 이제 마시멜로를 구워달라고 성화다. 나무 꼬치에 마시멜로를 끼우고 남은 잔불에 구워 아들 손에 쥐여줬다. 다 먹고 나니 소쿠리에는 석화와 가리비껍데기가 한가득이다. 역시 조개구이는 먹고 나면 쓰레기가 반 이상이다. 그런데도 조개구이를 포기할 수 없는 건, 굽고 먹고 치우는 사람들과 함께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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