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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스캠이 아니라니

by 일용직 큐레이터

러시아 여자영상 통화 제안에 심장이 뛰었다.

30대 중반, 먹을 만큼 먹은 나인데

22살 밖에 안된 러시아 여자와 영상통화라니...


뭔가 현실감이 없었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영상 통화를 빌미로 돈을 요구하겠지.


그래서 거절했다.

그녀와 영어로 대화하고 있었는데

당연히 번역기를 썼다.



당시 내 영어는 중학생 수준이었다.

메시지를 번역해 보내는 것도 벅찬데 영상통화라니

가능할 리 없다.


얼굴을 마주하면 더 부끄러워 어버버 할게 분명하다.

난 영어를 못한다.

그러니 영상통화는 무리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괜찮아. 가볍게 대화해 보자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 돈 벌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그녀의 끊임없는 구애에 하기로 했다.

대화 주제를 몇 가지 정해 놓고 번역기로 대사를 만들었다.

노트북 화면에 대본을 띄우고 몇 번 연습도 했다.


퇴근 후 책상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영상이 켜지고 마주한 그녀는 너무 예뻤다.

사진으로는 인상이 강한 편이었는데

영상은 순하디 순하다.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시작했다.

음식, 음악, 여행, 연애 등 주제를 가리지 않고 대화했다.

사실 그녀의 말을 50%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가 재잘재잘 떠들면

그래~, 응~, 그렇구나 하고 호응하는 정도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간혹 알아듣는 단어가 있으면 준비한 대사를 친다.

떠듬떠듬 말해도 그녀는 재촉할 줄 모른다.

웃으며, 혹시 말하고 싶은 게 이거지? 라고 짚어 준다.



30분도 못 버틸 줄 알았는데

첫 영상통화만 3시간을 했다.


내일 또 대화하자


점점 영상통화 횟수가 늘어갔다.

영상통화가 잦은 만큼 번역기를 쓰는 시간은 줄었다.

그녀의 입모양을 보고 말을 따라 했다.


이 때다! 싶을 때 복사한 말을 따라 했다.

그녀의 발음, 문법, 표정에 집중했다.

점점 영어 실력이 늘어간다.



도무지 그녀가 이해되지 않았다.

봄이 지나 여름이 올 무렵까지 그녀와 매일 대화했다.

지금쯤이면 돈을 요구할 때가 됐는데 아무 말이 없다.


여름 방학 때 한국에 갈 거야. 우리 만나지 않을래?


어느 날, 그녀는 본색을 드러냈다.

두 달간 한국에 온단다.

나를 꼭 만나고 싶다 했다.


떨렸다.

그러자고 했다.


며칠 후 이미지 하나를 보내왔다.

한국행 비행기 티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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