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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한국에 오던 날

by 일용직 큐레이터

그녀가 오던 날.

꽃 한다 발을 손에 들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나를 만나기 위해 9시간을 날아오는 그녀.

11살이나 어린 20대 초반의 여자가 왜 날 만나러 올까.

이 만남이 잘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녀가 오기 전 내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다.



사실 영상통화 하며 그녀에게 호감이 생겼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호응해 주는 모습에 반했다.

누군가와 3시간, 5시간 동안 여러 주제로 대화하기 쉽지 않다.


서로 통한다기 보다 그녀가 날 배려해 준다는 느낌이 강했다.

어눌한 영어, 이상한 답변도 웃으며 반응해 준다.


그런 그녀가 좋다.


그녀는 메시지로 잘 도착했음을 알렸다.

심장이 더 빨리 뛴다.

이대로 도망쳐 버리면 어떨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


땀에 젖은 손을 연신 바지에 닦으며 그녀를 기다렸다.


보라색 캐리어를 끌고 오는 그녀가 보였다.

진한 갈색 머리에 늘씬한 몸매를 보니, 사진 속 그녀와 똑 닮았다.

너무 예쁘다.


손을 흔들었고 그녀도 웃음으로 반긴다.

다가가 꽃다발을 건네며 살포시 안았다.

175cm나 되는 그녀는 나와 눈높이가 비슷하다.

이렇게 큰 여자는 처음이다.


배고프지 않아?


어색하게 첫 말을 건넸다.

기내식을 먹었다며 차 한잔 마시자 한다.


영상 속에서 보던 그녀를 실제 만나다니

현실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말도 횡설수설하고 눈이 흐려지며 집중이 안된다.


짐을 풀고 첫 식사로 치킨을 먹었다.

한국 치킨이 그리웠다고 했다.

양념 반, 후라이드 반 치킨을 시켰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눠보지만 잘 연결되지 않는다.

번역기를 쓰자니 대화가 단절되고

아는 단어만 조합하자니 밑천이 금방 드러났다.


그녀가 오기 전 영어 공부를 안 한 내 탓이다.


사실 이 정도면 그녀는 모든 걸 다 표현한 거다.

나를 만나기 위해 한국까지 날아왔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이제는 내가 나설 차례다.


다 큰 아저씨의 엉성한 고백에 그녀가 웃는다.

그렇게 우리는 사귀기로 했다.


훗날 그녀는 우리의 첫 만남을 두고두고 회자하며 날 타박한다.


왜 그때 꽉 안아주지 않았어?
왜 손 잡을 때 깍지 안 꼈어?


역시 남자는 박력인가 보다.

수줍은 아저씨의 말과 행동에 어지간히 실망했나 보다.


당시에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결혼생활 내내 내가 조금만 관심을 덜 주면

첫 만남을 소환해 날 타박한다.



그 여름 우린 참 많은 계획이 있었다.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

함께 하고 싶은 게 참 많았다.


우리가 처음으로 한 일은 커플링 만들기다.

이 나이에 커플링이라니...

여름이 봄같이 살랑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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