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간 떨어져 있던 와이프가 돌아온다.
비행기값은 6개월 할부로 치렀다.
더 이상 이산가족으로 지낼 수 없다.
우리는 가족이다.
가족은 함께 살아야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말이다.
큐레이터로 재취업하는 건 포기하기로 했다.
아니 포기는 하고 싶지 않다.
잠시 뒤로 미뤄 둘 생각이다.
수십 군데 지원한 공장 중 단 한 곳에서
면접 제의가 왔다.
공장 면접을 보러 가는데 정장을 입어야 할까?
좀 오버인 것 같아 청바지에 검정 셔츠를 입었다.
거리가 가 좀 있다.
말도 안 되는 조건만 아니면 일할 생각이다.
이 넓은 부산에서 나를 받아줄 곳은 많지 않다.
40대 초반의 무직, 알바남.
이게 내가 가진 전부다.
차를 몰고 공장으로 향했다.
밀리는 차만큼이나 내 마음도 꽉 막혀있다.
부산에 내려와 무엇하나 이룬 게 없다.
모두 내 능력부족이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다 여겼지만
순전히 내 착각이었다.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40대를 재취업시켜줄 곳은 많지 않다.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도 들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낮춰야 할까?
건설현장, 물류센터, 공장, 쇼핑몰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일당 8만 원짜리 기간제근로자도 탈락했다.
자존감은 바닥을 찍은 지 오래다.
백미러 속 늘어난 흰머리를 보며 한숨을 내쉰다.
공장 사장은 나보다 한참 어렸다.
다른 일을 하다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는 중이라 했다.
장남이라 어쩔 수 없이 맡았다는 말에
시샘마저 느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게
그곳이 정말 안전하고 양지바르다는 게
부러웠다.
내 이력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대학원 석사졸업.
본인도 대학원을 꿈꿨지만 포기했단다.
공장 이곳저곳을 안내해 준다.
친절해도 너무 친절하다.
부산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친절하다.
그만큼 사람이 간절하다는 의미다.
반대로 나처럼 경력이 없는 이를 반길 만큼
일이 어렵다는 반증이다.
면접 다음날 연락이 왔다.
최저시급을 제시받았다.
주간, 야간 매주 번갈아가며 일하는 조건이다.
240만 원 남짓이다.
세금을 떼면 220만 원 정도다.
여기도 아닌가? 싶어 거절하려는 차에
다시 메시지가 왔다.
시급 10%를 더 얹어 주겠단다.
그럼 280만이다.
세금을 떼면 250~260만 원은 되겠지.
차로 1시간 거리다.
기름값은 매달 10만 원 정도 보조받는다.
식사도 제공된다.
그럼 됐다.
열심히 하겠다 했다.
아내를 데리러 가는 날.
공장 일을 마치고 김해공항으로 향했다.
미리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미리 예약해 둔 꼿다발을 수령했다.
공항에서 마주한 아내는 여전히 예뻤다.
그동안 맘고생을 한 탓인지 몸이 말랐다.
늘어난 흰머리를 세 듯 내 얼굴을 훑는다.
몇 달 만에 레스토랑에서 파스타와 피자를 먹었다.
아내가 좋아하는 고르곤졸라 피자를 시켰다.
알바하던 40대 남자는 이제 공장에서
기술을 배운다.
20년 공부하고, 10년 넘게 종사한
박물관 일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아내를 먹여 살려야 한다.
지금은 그것만 생각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