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하는 거꾸리들
영하 17도, 체감 온도는 영하 25도.
입춘이 지나고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날 시기에 역대급 최강 북극한파가 한반도를 엄습했다.
매일같이 영월 쪽 일기예보만 째려봤다. 분명 호텔을 예약할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 추위를 예보하고 있지는 않았다. 예상과 달리 장기간 강추위가 계속되면서 기온은 사정없이 곤두박질치고 있는 중이다.
떠나자!
눈꽃세상 속으로
이른 새벽부터 우리의 하루는 시작됐다. 노는 것에 진심인 사람들은 눈뜨자마자 분주히 움직였다. 어젯밤 미리 정리한 짐가방을 챙기고 가면서 먹을 아침을 준비했다.
이제 겉옷을 입고 출발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가는 곳은 여기보다 훨씬 추워서 안에 옷을 여러 벌 껴입어야 해. 패딩도 다른 걸 입었으면 좋겠는데?"
"싫어. 그건 작단 말이야. 그리고 안에 김옷(기모 : 우리 꼬맹이 계속 이렇게 발음하는 게 귀여워서 안 고쳐줬네, 미안)이야."
"어휴... 누가 말려. 알아서 해. 대신 목도리랑 털모자는 챙겨야 해."
꼬마가 걸친 패딩은 마트에서 저렴하게 산 솜털 옷이다. 도시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가볍게 입기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해발 1,330m에 자리한 백두대간의 겨울은 다르다. 게다가 지금은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극지방의 칼바람이 부는 혹한기이다.
가볍고 따뜻한 구스다운 패딩을 입었으면 좋겠지만 오빠가 입던 카키색 패딩이 마음에 들지 않던 꼬마는 사이즈가 작다는 핑계로 입기를 거부했다.
꼬마패딩 사이즈 145, 오빠패딩 사이즈 152
명백히 사이즈가 표기되어 있다. 한동안은 엄마의 등쌀에 못 이겨서 입고 다녔지만 오늘 만큼은 잔소리가 통하지 않는다.
발이라도 따뜻했으면 하는 마음에 작아서 못 신고 있던 내 부츠를 신으라고 꺼내줬다. 하지만 녀석은 핑크색이 마음에 들지 않고 사이즈가 크다면서 투덜댔다. 이젠 작아져서 발이 들어가는지도 의문인 녀석의 부츠를 신고 가겠다고 했다.
발볼이 맞지 않아서 사놓고 방치해 둔 내 운동화는 평소에 잘만 신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만 말이 바뀌는 아이러니한 녀석이다. 핑크색이 싫다던 꼬마는 쨍한 '진분홍색' 솜털 패딩을 입고 집을 나섰다.
출발 전부터 정신없는 건 변하지 않는 기정사실인가 보다.
우여곡절 끝에 열심히 달려온 곳에는 새하얀 눈밭이 펼쳐진 눈꽃세상이 있었다. 이 높은 곳까지 등산을 하지 않고 차로 오를 수 있다니... 정말 살기 좋은 세상이지 않은가!
동심으로 돌아간 우린 뽀드득뽀드득 신나게 눈을 밟으면서 눈밭으로 걸어 들어갔다. 조금만 안으로 들어가도 온통 눈 덮인 나무가 가득한 다른 세상이 나왔다. 외부의 모든 소음은 차단되고 오직 자연만이 존재하는 신비로운 풍경에 넋을 잃고 바라봤다.
"엄마, 이제 다 봤으니까 그만 가자."
"응? 지금 막 들어왔는데 벌써 가자고?"
"춥단 말이야. 그냥 차로 가면 안돼?"
가만있어보자...
출발하기 전에 확인한 기온은 분명 영하 17도를 찍고 있었다. 짱짱한 햇빛과 푸른 하늘이 청명한 산속으로 들어오니 거짓말처럼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눈 속에 파묻히니 포근하고 안락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 이제 막 도착했으니까 조금만 구경하고 가자. 저기 좀 봐봐. 세상에나~~! 겨울왕국에 온 거 같지 않아?"
철없는 엄마는 처음 보는 눈꽃에 홀랑 넘어가서 좀처럼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바람이 살랑 지나가면서 나무 위에 쌓여 있던 눈꽃바람을 솔솔 뿌렸다. 비현실적인 풍경에 취해 오히려 더 깊은 곳까지 걸어 들어갔다.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눈앞에 보이는 경이로운 순간을 카메라에 담는데 열중했다. 큰아이의 무표정한 뒤통수와 작은아이의 뾰로통한 얼굴을 예쁜 배경과 함께 열심히 찍어댔다.
오늘따라 말없이 잘 걷는 아들과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숲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이제 그만 가자고! 나 춥단 말이야!"
카랑카랑한 꼬마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아직 눈밭에 드러눕지도 못했는데... 저 끝까지 올라가 보고 싶었지만 녀석의 앙칼진 목소리가 신경 쓰여서 그만 차로 돌아가기로 했다.
우리의 첫 눈꽃여행은 30분 컷으로 짧게 끝나버렸다. 진귀한 풍경을 보기 위해 먼 길을 새벽부터 부지런히 달려왔는데 이대로 떠나야 하다니... 아쉬운 마음에 밖으로 나가는 길에도 나의 시선은 계속해서 설원을 향하고 있었다.
이때만 해도 몰랐었다. 녀석이 얼마나 큰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는지... 나중에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그 속에 담겨있는 양볼이 빨개진 꼬마가 유난히 추워 보였다.
발열내의, 얇은 티셔츠, 기모티셔츠, 경량패딩, 극한의 북극한파에도 끄떡없다는 겨울패딩, 모든 바람을 다 막아준다는 패딩골프바지, 따뜻한 양털부츠, 포근한 울목도리까지 완전무장을 하고 그 성능을 몸소 체험하느라 추운 줄도 모르고 돌아다녔던 나와 달리 꼬마는 무거운 솜털패딩과 핫팩에 의지한 채 추위와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종아리까지 쌓인 눈을 밟겠다고 푹푹 밟고 다녔다가 녀석의 부츠 속에 눈이 들어가서 여분으로 챙겨간 내 신발을 신고 다녔었다. 발이 차가우니 몇 곱절은 더 추웠을 것이다.
그러니까, 엄마 말 좀 듣지 그랬어!
말을 듣지 않고 멋대로 하다가 추위에 떨게 된 딸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미 지나간 것을...
세상을 살아온 시간이 다른 아이들은 경험의 깊이가 얕을 수밖에 없다. 아이들의 사고가 어른의 것을 따라올 수 없기에 당연히 내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낼 수밖에 없다.
잔소리가 통하지 않을 땐 과감히 포기하고 만다. 직접 부딪히고 경험하면 무언가 깨닫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런데 어디까지 놔둬야 하는 것일까?
전부 아이의 뜻에 맡겨 놓을 수는 없다. 그릇된 길은 바로 잡아줘야 할 의무가 있으니 말이다. 이번과 같은 일에도 내가 조금 더 고집을 부리고 밀어붙였더라면 녀석은 혹독한 추위를 경험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경계가 모호하고 판단이 쉽지 않은 일들이 너무나도 많다. 아이들보다 고작 몇십 년 더 산 어른이기에 매 순간 성숙한 척하고 있는 것뿐이지 삶은 여전히 어렵다.
"꼬마야, 엄마가 사진 보다가 생각한 건데 이때 많이 추웠겠다. 엄마가 몰라줘서 미안해."
딸아이를 살며시 안아주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엄마가 하는 말에 조금만 귀 기울여 달라는 당부와 함께... 녀석은 긍정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평소 꼬마보다 추위를 더 잘 타는 큰아이는 유난히 아무 말이 없었다.
알고 보니 밖에서 딸아이와 실랑이하는 소리를 듣고 조용히 옷을 여러 벌 껴입었다고 한다. 경량패딩까지 야무지게 챙겨 입은 덕분에 춥지 않았다고...
이건,
카페인이라고!
아쉬웠던 눈꽃여행을 마치고 역시나 하루를 그냥 지나칠 리 없는 우리 가족은 평창으로 넘어가서 양떼목장도 방문하며 긴 하루를 야무지게 즐겼다. 극한의 추위를 겪고 나니 영하 10도쯤이야 따뜻한 거라면서...
여행의 마지막 날은 공기놀이로 알차게 마무리 지은 우린 그냥 가기 아쉽다면서 다음 날 강릉에 있는 한 카페를 찾았다.
"이건 카페인이야!"
메뉴를 고르는데 청소년 아들이 시그니처 메뉴인 카페라테를 골랐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 몰라. 밀어붙여!!"
조금이라도 뜻을 굽힐 생각이 없던 녀석은 결국 카페라테를 마시는 데 성공했다. 친구들은 벌써 커피를 마신다는 말과 함께... 하...
그렇게 원하던 커피를 받아 든 녀석은 양이 왜 이렇게 작냐며 투덜대면서도 벌컥벌컥 잘도 마셨다.
"찔끔찔끔 먹으면 맛이 안나. 입안에 가득 들어있을 때 맛이 나."
놀라운 광경을 토끼눈을 하며 쳐다보는 내 시선이 부담스러웠던지 묻지도 않은 말에 대답을 했다.
"밥을 좀! 그렇게 먹어봐."
"그래서 내가 국밥은 잘 먹잖아. 씹는 건 귀찮단 말야."
후...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 아쉬워서 바다를 보러 해변으로 나갔다. 철썩철썩 시원하게 몰아치는 파도를 바라보니 속이 시원해졌다.
유난히 높은 파도가 예뻤다.
끊임없이 밀려왔다가 도망가는 파도와 술래잡기를 하며 뛰노는 딸아이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한참을 놀다가 차로 돌아가려는데 녀석이 성큼성큼 뛰어오며 말했다.
"엄마, 힘들어. 원래 이렇게 힘든 거였나? 나이가 드니까 몸이 무거워져서 못 뛰겠어!"
"뭐라고오?"
녀석이 하는 말에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왔다. 엄마가 웃자 딸아이도 따라서 웃는다. 하여간 입만 살아서 말은 잘하지... 으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