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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도시, 빈

클래식 여행

by JULIE K

왕궁 산책을 마치고 다시 도심으로 향했다. Kohlmarkt거리를 따라서 걸어가는 길에 쫙 늘어선 명품숍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나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상점이지만 그냥 밖에 서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우리나라의 명품숍은 아무나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라면 외국에서 여행자의 신분으로 바라본 명품숍은 하나의 관광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건물에 반하고 상점에 취해 골목골목을 걷는 것이 신이 나서였을까? 그저 나 있는 길 따라 정신없이 걷다 보니 제법 멀리까지 와있었다. 생각 없이 걷다 보면 끝도 없을 것 같아 다시 방향을 돌리기로 했다.


달달달달~~~


아스팔트길이 아닌 옛 돌길을 달리는 동차 바퀴의 기분 좋은 소리를 뒤로 한 채 슈테판 광장 쪽을 향해 되돌아갔다.



오~ 필승 코리아!


배가 고파서 달려간 곳은 격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햄버거 가게다. 한산한 가게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벽면에 걸려있는 TV에선 축구경기를 중계해주고 있었다.


월드컵이 한창인 지금 때마침 한국과 스위스의 축구경기가 한창이었다. 끼니를 때우면서 경기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낯익은 한국 선수들이 열심히 뛰고 있다.


현재 시점 스코어 1대 1.


옆테이블에 앉은 꼬마친구가 한국을 응원해 줬다.


유럽에서 축구경기를 보는 것은 상당히 흥미진진하다. 축구 시즌이면 펍에서는 주로 축구 중계를 틀어줬었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진심으로 응원했다.


독일 월드컵 때, 한국 경기가 있는 날엔 펍 매니저가 한국 국기를 크게 걸어줬고, 약속이라도 한 듯 붉은 계열의 옷을 입은 사람들과 열광하며 응원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천만다행인 것은 지금 치르고 있는 경기는 오스트리아팀의 경기가 아니란 것이다. 기 흐름에 따라 살아서 나갈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지금 이곳은 축제 분위기다. 한국을 응원해 주는 사람들 덕분에 맘 편히 신나게 축구경기를 보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클래식이 있는 곳,


거리로 다시 나와서 이번엔 '시립공원(Stadtpark)'으로 향했다. 19세기 영국식 공원은 어떻게 생겼을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깔끔하게 정돈된 거리와 여전히 개성 넘치는 우아한 건물들이 걷는 동안 무료함을 달래줬다. 점점 많아지는 사람들을 따라서 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바로 앞에 황금빛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동상(Johann Strauss Monument)'이 반짝이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침 하늘도 맑게 개어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을 듬뿍 받은 동상이 늠름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기념사진을 남기기에 정말 좋은 조건이다.


신나게 사진을 찍고 바로 뒤에 흐르는 강을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강이라고 하기엔 더운 날에 말라비틀어진 하천물처럼 쫄쫄쫄 흐르는지 고여있는지 알 수 없을 물이 아주 조금 담겨 있었다.


세수나 겨우 할 수 있을 정도의 강물에 비해 양쪽을 잇는 다리와 곳곳에 세워진 동상 및 조형물들은 너무나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조화롭지 못한 풍경을 바라보며 뜨거운 태양을 피할 곳 없어 얼굴이 점점 이글이글 익어 갈 때쯤, 저 멀리 빛에 가려져 흐릿한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점점 가까워져 가는 얼굴에는 마치 오래전부터 나를 알아온 것 마냥 환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안녕하세요? 한국사람인가요?"


"네? 아... 네..."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그녀의 얼굴이 빛을 뚫고 선명하게 보였다. 어눌한 발음이지만 정하고 또박또박 힘주어 뱉은 말은 다름 아닌 한국어였다.


"나는 인도사람이에요. 울산에서 3년간 지냈었어요."


"어머나~~! 어쩐지 한국말을 정말 잘하셔서 깜짝 놀랐어요!"


경계심이 풀린 난 그제야 호들갑을 떨며 아는 체를 했다. 길 위에서 만난 두 여자는 정말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수다를 이어갔다.


한국에서의 생활, 좋아하던 음식 등 고국을 그리워하듯 그녀가 지난 기억을 쏟아내면 나는 맞장구를 쳤고, 지난 인도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며 화제성을 이어갔다.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며 우린 함께 사진을 남겼다. 여행 중 만난 낯선 이와 남긴 첫 기념사진이었다.


화기애애했던 만남을 뒤로하고 순식간에 다시 혼자가 된 나는 터덜터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잠시동안의 즐거움이 큰 만큼 상대적으로 외로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

혼자 하는 여행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도심 속에 있는 공원은 마치 숲 속에 들어온 듯한 청량함을 자랑하며 사람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해 줬다. 수많은 공원에 다녀왔지만 이토록 자연 가까운 공원은 처음이었다.


초록의 나무에 둘러싸인 작은 연못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원이 익숙한 듯 자연과 어우러진 사람들을 보니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잠시 그들 곁에 머물며 조용히 사색에 잠겨본다.



링로드로 옮겨서 길을 쭉 따라가면, 독일 남부에서부터 시작해서 헝가리 부다페스트까지 흐르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긴 '도나우강(Danube)'을 만날 수 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경쾌하고 아름다운 선율이 움직일 때마다 물 위에서 유유히 왈츠를 추는 백조와 가볍게 통통 튀어 오르는 물방울들이 연상된다.


그런데...


강에 가까워질수록 지금껏 본 적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고, 맑고 푸를 거라 생각됐던 강물은 좁고 색도 탁해 보였다. 뭔가 자연과 함께 있을 거라 생각됐던 도나우강은 대에 발맞춰 변화하고 있었다.


기대와 다른 모습에 실망한 채 더 이상 할 것이 없자 미련 없이 슈테판 대성당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모든 길은 한 곳으로 통한다고 했던가?


하루에도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니 그새 정이 들어 마음까지 편해지는 곳이다.


성당과 가까워질 때쯤 어디선가 익숙한 클래식이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가 보니 사람들이 도로 한복판에서 악기를 가지고 클래식을 연주하고 있었다.


바이올린을 켜고 거대한 피아노와 첼로까지 거리에서 연주하고 있는 이들의 버스킹은 스케일이 남달랐다.


이토록 낭만적인 거리의 풍경이라니!


사람들 틈에 서서 음악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클래식이 함께 하는 빈... 이제야 오스트리아에 온 기분이 났다. 온종일 이 순간을 위해 달려온 것만 같았다. 음악을 들으면서 옆에 서 있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내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한여름의 오후가 지고 있다.


하루 종일 우리를 쨍하게 밝혀주던 태양이 더위와 함께 사라져 가자 어디선가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상쾌한 바람을 타고 음표가 불어온다. 음악이 있는 도시 빈에서의 청량했던 이틀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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