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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조 있는 도시, 비엔나

시간여행

by JULIE K

모처럼 단잠을 잤다. 개운함에 기분 좋게 눈을 떴는데 뭔가 이상하다. 가지런히 놓여 있어야 할 신발이 흐트러져 있었다. 침대 선반 위에 있어야 할 키도 바닥에 떨어져 있다.


잠결이었지만 새벽에 외국인 여자 두 명이 들어온 것이 기억났다.


설마...!!


벌떡 일어나서 가방 안을 살폈다. 지갑을 열어보니 어? 돈이 없다. 아니다! 반대편을 열어보니 돈이 있었다. 침착해야 하는데 내 물건에 누군가 손을 댔다는 생각이 이성을 잃게 만들었다.


지폐를 꺼내서 세어봤다. 이제 겨우 여행 이틀차이기에 지갑 안에는 돈이 제법 두둑이 들어있었다. 열심히 세어 본 결과 100유로가 빈다. 티 안 나게 누군가 슬쩍 빼간 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침착하게 다시 세어봤다. 휴... 다행히 돈은 무사했다.

믿을만한 건 개인 사물함 뿐


유스호스텔에서 지낼 때엔 항상 긴장을 늦추면 안 된다.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언제 어디서 뒤통수를 칠지 모를 일이다. 다행히도 지금까지 그런 일을 겪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세부에서 위험천만한 여행지로 손꼽히는 시장에서도 아무 일이 없었고,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손목에 팔찌가 채워진다는 몽마르 인근에서도 나에게 팔찌를 채운 이는 없었다.


그럼 그렇지... 어둡고 잘 안 보이니까 모르고 건드렸을 수도 있잖아? 아무리 그래도 침대 안쪽 선반 위에 있던 것이 바닥에 떨어진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찝찝했지만 잃어버린 물건이 없다는 것에 안도하며 조금 이른 하루를 시작했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
Vienna


하루 만에 익숙해진 거리를 걸어 본다. 명 여름인데 찬바람이 불어온다. 생각보다 쌀쌀한 아침공기에 놀라 종종걸음으로 '호프부르크 왕궁(The Hofburg)'으로 향했다.


이른 시간이지만 이곳은 이미 단체 관광객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일제히 이동하는 곳으로 따라갔다.


우와~~~!!


정면에 둥근 아치형으로 펼쳐진 왕궁의 크기가 분위기를 압도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풍경이다. 아쉽게도 한쪽은 보수 공사가 진행 중이라 온전한 사진을 남기지 못했다.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우르르 몰려가는 관광객들과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의 첫 번째 목적지는 바로 '모차르트 동상(Mozart Statue)'이기 때문이다.


클래식에 조예가 깊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많이 찾아서 듣곤 했었다. 피아노를 배우면서 접하게 된 모차르트는 특히나 더 가깝게 느껴졌다.


옛 건물들 사이를 걷고 있는 기분은 마치 과거의 시간 속으로 들어온 느낌이다. 수많은 유럽의 건물들을 봤지만 조금씩 특색 있게 지어진 건물들이 제각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 도시가 제일 이상적이고 품이 서려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귀족들이 무도회를 즐기듯 풍스러운 건물들이 우아하게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왕궁의 정원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가면 동상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푸른 잔디가 넓게 펼쳐진 곳에선 연두색 조끼를 입은 꼬마 친구들이 모여서 뛰어놀고 있었다.


그들의 행복한 웃음소리를 감상하며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온다.


"Excuse me..."


아... 영어회화시간에 정말 많이 듣던 깔끔하고 정확한 미국식 발음이다.


"혹시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미국인 남자는 얼떨결에 들어온 왕의 궁전에서 길을 잃은 모양이다.


"아... 지도 갖고 있어요?"


"아니요. 지도는 없네요."


호스텔에서 가지고 온 지도를 펼쳐 보이며 현재의 위치를 설명했다.


인근에 가 볼만한 곳은 어디가 있는지 도보로 이동이 가능한지, 이곳이 왕궁인지 현재는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등등 유럽을 여행 중이라는 남자의 궁금증 어느새 해소해 주고 있었다.


급할 때 나오는 내 영어실력에 가끔 놀랄 때가 있다.


손에 들고 있던 지도를 슬며시 건네주니 남자는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쿨하게 악수하고 헤어지는데 왠지 모를 뿌듯함이 올라왔다.


안으로 걸어가니 높은 음자리표 모양으로 가꾸어진 화단과 함께 모차르트 동상이 보였다.


반가워요! 모차르트 님~!


단순한 동상이 아니었다. 품위 있는 모습에서 위엄이 느껴졌다. 수백 년이 지나도 그의 천재적인 작품은 만인에게 사랑받고 있지 않나.


위인은 역시 위인이다.


말없이 한동안 동상을 바라보다가 호프부르크 왕궁 주변을 산책했다. 넓은 광장을 멋들어지게 누비는 마차가 눈에 띄었다.


21세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13세기의 거리를 아무렇지 않게 거닐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는 말도 안 되는 지금 이 순간이 한없이 소중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왕궁을 누비며 마지막으로 '시시 박물관(Sisi Museum)'과 마주했다. 황후를 만나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환영의 인사를 건네듯 아름다운 실루엣의 시시가 입구 정면에 서 있었다.


순간 들어가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지만 잠시 망설여졌다. 타이트한 예산도 신경이 쓰였고, 오후에 다녀야 할 남은 일정에 시간적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어제 별궁을 둘러봤잖아. 내부는 다 비슷하지 않겠어? 돈도 아껴야 하니 계획대로 움직이자.'


훗날 여행을 마치고 이 순간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한 번뿐인 기회였는데 잠깐이라도 들어가 볼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빈은 도시가 작아서 링 안쪽과 바깥쪽으로 단 이틀이면 충분할 거라 장담했던 내 판단은 큰 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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