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en, Austria
오전 7시.
웨스트 반(Wien Westbahnhof) 역에 도착했다. 여행을 할수록 지도를 보지 않고 숙소까지 찾아가는 능력이 점점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미리 지도를 탐색한 덕분에 바로 목적지까지 찾아갈 수 있었다.
체크인을 마치고 라운지에 앉아서 가족들과 통화를 했다. 나의 여행루틴 중 하나인 밀린 일기를 쓰고 인터넷으로 필요한 정보를 검색하며 나름 시간을 알차게 썼다.
오전 8시.
본격적인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밖을 나섰다. 아침부터 푹푹 찌는 더위가 심상치 않다.
우연히, 혼자가 아닌...
2일권 교통카드를 구입하고 링밖에 있는 '쇤부른 궁전(Schönbrunn Palace)'으로 향했다. 외곽지역에 있는 궁전투어부터 마치고 구시가지를 여유 있게 둘러볼 생각이다.
하필이면 여행책과 지도를 숙소에 두고 나온 바람에 온전히 기억에만 의지한 채 찾아가야 했다. 출발하기에 앞서 시뮬레이션으로 여행을 마친 덕분인지 다행히 헤매지 않고 단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계획을 세우고 미리 지도를 보고 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현지에서 이동 시간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때로 간접체험을 한 뒤라 막상 현지에서는 내가 봤던 경로가 맞는지 확인하는 작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무언가 새롭다고 느껴지지 않을 때 갑자기 일어나는 일들은 여행에서 또 다른 흥미를 가져온다.
지하철 역에서 내려서 궁전을 찾아가는 길에 한국에서 온 대학생을 우연히 만났다. 방학을 맞이해서 여행을 떠나 왔다고 했다. 나와 같은 숙소에서 머물고 있었으며 오늘 오후에 '잘츠부르크'로 넘어간다고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걷다 보니 순식간에 궁전 앞까지 도착했다. 그녀는 궁전 내부는 관람하지 않는다고 해서 인사를 나누고 티켓을 사러 갔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여름별궁으로 사용했다는 궁전 내부는 어떤 모습일까.. 잔뜩 기대하며 주요 공간을 다 둘러볼 수 있는 그랜드투어 입장권을 끊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국어가 지원되는 오디오가이드가 있어서 편하게 구경할 수 있었다.
궁전 내부는 깔끔하고 심플한 외관과 달리 생각보다 화려하고 예뻤을 것이다.
사실 내부 촬영이 금지되어 사진이 한 장도 남아있지 않다 보니 안타깝게도 궁전의 모습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벌써 10여 년이 흐른 뒤이기 때문에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려 애써봐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유럽의 궁전들은 저마다 개성 넘치는 외관과 달리 내부는 대부분 비슷비슷하다. 고풍스러운 가구들이 하나같이 휘황찬란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저마다 개성이 다르겠지만 내 눈에는 호사스러운 장식들이 똑같아 보였다.
그렇기에 어쩌다가 떠오르는 기억 조각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프랑스에 있는 궁전인지 독일에 있는 궁전인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유일하게 알게 된 것은 소무도회장이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웠다고 스스로 남긴 기록뿐이었다. 기록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일깨워준 순간이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최근에는 실내 촬영이 가능하다고 한다. 여행자들이 남긴 사진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잊고 지낸 기억들을 슬며시 꺼내 볼 수 있었다.
내부 관람을 마치고 나와서 드넓은 정원을 거닐었다. 좌우 대칭을 이루며 조경이 잘 가꾸어진 프랑스식 정원은 작은 베르사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면에 글로리에테(Gloriette) 전망대가 보였다. 저곳에 올라가면 궁전과 빈 시내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 멀리 까지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중간쯤에 있는 분수대까지만이라도 가보자 하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아까 만났던 한국인 여학생을 다시 만났다. 한 번 통성명을 한 사이라 그런지 반가웠다. 이것도 인연이라며 다음 여행지인 '벨베데레 궁전
(Schloss Belvedere)'은 함께 여행하기로 했다.
뜻밖의 동반자가 생겼다.
Volare oh, oh
Cantare oh, oh, oh, oh
Nel blu, dipinto di blu
Felice di stare lassù
벨베데레 궁전으로 향하는 트램 안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나는 리듬에 흥이 절로 났다. 이탈리아 노래인 Volare. 세계적인 히트송답게 마음속으로 소심하게 함께 불러본다.
이제야 유럽에 온 기분이 났다.
함께 이동하고 있는 친구와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보니 금세 다음 목적지에 도착했다.
노란색 건물의 따뜻한 색감이 강렬한 여름을 나타내는 쇤부른 궁전과 달리 조금 더 차분한 느낌의 벨베데레 궁전은 에메랄드 색으로 포인트를 준 지붕과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인상적이다.
바로 앞에는 탁 트여 있는 프랑스식 정원이 쭉 뻗어 있어 시원한 느낌을 준다. 적당히 흐린 하늘이 걷기 좋은 날이라며 유혹하지만 절반 이상은 내려가지 않았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단 하나,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벨베데레 궁전은 현재 미술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미술에 대한 조예가 깊지는 않지만 예전에 한국에서 클림트전시를 본 기억으로 동행하는 친구와 대화를 이어 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온통 금빛 세상이 펼쳐졌다. 반짝이는 금색을 사용한 그림들은 눈부신 자태로 고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본고장에 와서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아침부터 눈이 호사를 누렸던 시간이었다.
기내식을 먹은 뒤로 종일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시내로 향했다. 이른 시간부터 부지런히 다닌 결과 궁전투어를 알차게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정오가 안되었다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어냈다.
"유럽은 노천이지!"
마음이 통한 우린 야외테라스가 있는 식당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오스트리아에서 꼭 먹어봐야 한다는 치킨으로 만든 슈니첼과 추천받은 소시지 그리고 시원한 맥주를 시켰다. 더위를 이기는데 이만한 것이 없다. 한낮에 마시는 맥주만큼 행복한 것이 또 있으랴...
혼자가 아닌 이 시간이 더욱 즐겁다.
음식도 담백하니 맛있었다. 야외에 자리 잡고 앉아 있자니 이제야 여유가 좀 느껴졌다. 낯선 이를 만나서 함께 여행하고 식사를 하며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화가 이제는 어색하지 않다.
오후엔 잘츠부르크로 가야 하는 그녀와 서로의 여행을 응원하며 헤어졌다.
인천공항에서부터 시작해서 뉴델리 공항을 거쳐 빈에 도착하기까지 꼬박 하루의 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부여받은 오늘은 이제 막 반나절을 지나가고 있다.
나의 진정한 여행은 이제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