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세계로 돌아갈 때
아침부터 반갑지 않은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어제 잠시 반짝 예뻤던 하늘은 밤사이 도망가버리고 말았다. 그럼 그렇지... 이제는 흐린 하늘이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제법 이곳의 날씨에 익숙해졌는데 벌써 여행의 마지막 날이라니...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가지만 유독 여행을 오면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다.
밖으로 나오니 다행히도 내리던 비가 금세 그쳤다. 오늘의 산책 코스는 해안가를 따라서 걷는 '잉글리시 베이(English Bay Beach)'로 정했다. 도심을 가로질러서 부지런히 걸어가 본다.
짙게 내려앉은 먹구름 사이로 광명이 비췄다. 하늘을 닮은 바다색이 인상적이다. 고요하고 쓸쓸한 풍경을 바라보니 온 신경이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나와 같이 홀로 해변가에 나와서 바다를 감상하는 사람 혹은 이 길을 산책하는 사람들이 드물게 지나갔다. 저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겠지만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경치를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됐다.
잔잔한 나의 아침이 흐르는 물 따라 지나가고 있다.
상쾌했던 바닷바람을 실컷 마시며 머릿속에 있던 온갖 생각들을 비워내는 데 성공한 나는 마지막으로 Sea bus를 타기 위해 워터프런트 역으로 이동했다.
노스밴쿠버에 있는 '론즈데일 키 마켓(Lonsdale Quay market)'에 가 볼 생각이다. 신기하게도 이번 여행에서는 내가 가는 곳에 항상 마켓이 있었다.
스카이라인의 짙은 그림자,
Lonsdale Quay market
배를 타기 위해 승강장으로 들어섰다. 지하철을 타러 들어가는 기분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간 곳에 스크린도어가 있었다. 지하철에 탑승하듯 스크린도어가 열리면서 배에 오를 수 있었다.
평소 쉽게 이용할 수 없는 교통수단은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온다. 나란히 놓여있는 의자에 앉아서 창밖으로 보이는 경치를 바라봤다. 멀리 있던 건물이 점점 가까워지며 도착을 알렸다.
배에서 내려서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밴쿠버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층 더 우중충해진 하늘 덕에 건물의 빛을 잃고 색이 사라진 스카이라인이 그림자처럼 길게 뻗어있었다.
이토록 신비로운 풍경이 있을까? 한동안 서서 평생 잊지 못할 이 순간을 가만히 바라봤다. 다시 또 오지 못할 이곳을 기억 속에 저장해 본다.
마켓은 배에서 내리면 바로 연결되어 있어서 찾기 쉬웠다. 빨간색의 철근으로 둘러싸인 건물이 눈에 띄었다. 마지막 마켓 투어가 시작됐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아서 조용한 분위기다.
규모는 작지만 상점마다 볼거리는 알차게 있었다. 마켓마다 가지고 있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래서 자꾸만 찾게 되는 건가?
3층까지 꽉 찬 상점들을 천천히 구경했다. 사람이 많지 않아서 편안하게 둘러볼 수 있었다. 지나가면서 봐두었던 메이플시럽 시나몬 빵 두 개를 사들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는 노천에서 음식을 먹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혼자서 식당에도 못 들어가고 음식도 못 먹던 아줌마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가 아닐까 싶다.
태양이 내려앉으면서 어두웠던 스카이라인에 조명이 켜졌다. 다행이다. 돌아가는 길은 밝은 모습이어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여행의 끝은 기념품 쇼핑이 어울린다. 철저한 관광객모드를 켜고 시내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꼭 먹어보고 싶었던 메이플시럽과 연어 육포, 아들을 위한 메이플사탕도 놓치지 않고 구입했다. 내 영어 이름이 적힌 키링도 빼먹지 않는다.
소소하게 기념품을 사는 것은 여행의 기쁨 중 하나이다. 먼 훗날 오늘을 기억하기 위한 소중한 재산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번 여행을 기억할 만할 물건을 사들고 시내 곳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걷다 보니 로마의 콜로세움과 비슷한 외관을 자랑하는 '밴쿠버 공립 도서관(Vancouver Public Library)'이 나왔다. 아름다운 도서관이라고 불릴 만큼 독특한 건물이 눈에 띄었다.
내부가 어떨지 궁금했지만 이미 아침부터 계속 걸었던지라 겉모습만 보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마침 폐장시간도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호텔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캐나다 플레이스에 한번 더 가보기로 했다. 근처에서 샌드위치까지 야무지게 포장해서 부푼 마음으로 달려갔는데... 웬걸!
짧은 시간 사이 해는 져버렸고 종일 흐렸던 하늘 탓인지 바다 너머로 캄캄한 어둠만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얼마 전 사람들로 활기찼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저 멀리 캐나다 플레이스를 상징하는 다섯 개의 돛대만이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멋진 야경을 보고 싶었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이 바다인지 산인지 구분도 안 되는 현실이 아쉬웠다. 별 수 없이 터덜터덜 발길을 돌려서 시내 쪽으로 향하는데 순간 눈앞에서 별처럼 쏟아지는 불빛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이 순간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됐다. 빌딩숲의 야경에 꽂혀서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건물에 불이 켜져 있을 뿐인데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세상에 반짝이는 것들을 모두 이곳에 모아놓은 것 같았다.
밤하늘에 별을 뿌려 놓은 것처럼 환상적인 풍경이었다.
캐나다가 보여준 자연은 그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로웠다. 흐린 하늘이 만들어낸 장관이었다. 마지막 페이지가 화려한 야경으로 장식되자 에너지가 절로 차올랐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평범한 지금 이 순간이 내게는 큰 행복으로 다가왔다.
육아에 살림에 치이며 살아가다가 다시 일을 시작했고 첫 번째 휴가를 의미 있게 보내고 싶어서 정신없이 무작정 이 먼 곳까지 날아왔다.
컨디션 난조로 시작은 힘겨웠지만 매일같이 펼쳐졌던 경이로운 풍경에 치유받으며 점점 힘을 다시 찾게 되었다. 거대한 빌딩 숲의 야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지나왔던 날들이 주책맞게 떠올랐다.
막연히 떠나 온 여행은 언제 또다시 기회가 올지 모르기에 늘 마지막인 것이 된다. 그렇기에 이 순간을 누릴 수 있는 지금이 소중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