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강물처럼
폭신한 침대에 깊이 빨려 들어가 있는 몸뚱이는 천근만근이다. 어젯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긴장이 풀려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테이블 위에 곱게 개어진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정신없던 와중에도 씻고 짐정리까지 반듯하게 해 놓았다니... 근성은 어쩔 수 없는 건가...
어제 있었던 사건이 떠올랐다. 이성적으로 조금 더 버티지 못했던 나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이대로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으면... 하지만 새로운 하루는 어김없이 찾아왔고 나는 또다시 주어진 시간을 살아내야만 한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라고, 이제 그만 잊어도 된다며 최면을 걸었다. 깊게 심호흡을 했다. 기분이 한결 편안해졌다. 어이없던 내 모습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게 뭐라고.. 별거 아니야!'
지난 일은 쿨하게 과거에 묻어두기로 하고 침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굳은 몸을 깨웠다. 여행이 끝나갈 즘 되니 컨디션이 슬슬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어제의 여파로 내 몸이 절로 각성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눈치는 있어야지...!
며칠 전에 봤던 흐린 하늘이 창밖에서 반긴다. 역시 변한 게 없구나. 비가 오지 않는 게 어디야... 끊임없이 떠오르는 부정의 기운을 억누르며 긍정의 생각들을 열심히 주입시켜 본다.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니 일단은 실내 위주로 다녀 볼 생각이다. 주말에는 1 존 카드로 2, 3 존까지 갈 수 있으니 오늘은 2 존에 있는 쇼핑몰에 가보기로 했다. 간단하게 짐을 챙겨서 호텔 밖으로 나가본다.
다시 여기,
밴쿠버
쇼핑몰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달려간 곳은 '식당'이었다. 본격적으로 돌아다니기 전에 에너지를 먼저 보충할 생각이다. 몸도 좋지 않은데 끼니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해서 그 사달이난 것 같아 오늘은 따뜻한 밥 한 끼로 허기진 위장을 달래 보려 한다.
조금 덜 자극적인 '파인애플 치킨데리야끼 덮밥'을 골랐다. 단백질이 들어가면 기운을 차릴 수 있을 것이다. 야무지게 한 그릇을 해치운 뒤 자꾸만 떠오르는 미련한 생각 덩어리들을 모조리 해치울 기세로 쇼핑몰 안을 돌아다녔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양손에는 쇼핑백이 가득 들려 있었다.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가족들을 위해 구입한 물건들은 호텔방에 고이 모셔뒀다. 쇼핑으로 완벽하게 기분전환을 마친 뒤에야 비로소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Harbour Green Park
호텔 바로 앞에 있는 공원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별생각 없이 공원 안으로 들어서니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여태껏 본 적 없는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에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봤다.
저 멀리 산 너머에는 새하얀 눈으로 덮인 설산이 수줍게 얼굴을 쏙 내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늘에 옅은 빛줄기가 그 모습을 더욱 경이롭게 비추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커다란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이끄는 대로 시선을 돌렸다. 최대치로 동력을 끌어올린 뒤 잔잔한 물결 위를 세차게 가르며 이제 막 이륙한 수상비행기가 눈에 띄었다.
'여기에 웬 경비행기가 있지?'
허공 속으로 멀어져 가던 비행기는 하나의 점이 되어 희미해져 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들려오는 프로펠러 소리가 가슴속까지 깊이 파고들었다.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 걸까? 순식간에 낯선 곳으로 데려다주는 비행기는 언제나 설렌다. 계속해서 수시로 드나드는 수상비행기를 가만히 바라봤다.
새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물 위를 시원하게 질주하다가 공중으로 떠올라서 어디론가 사라지면, 새로운 비행기가 다가와서 또다시 물줄기를 가르며 착륙했다.
수상기 동체 하단부에 있는 두 개의 커다란 부유체에 눈길이 갔다.
물 위에서 기체를 띄우기 위함일까? 그 크기가 비행기의 절반은 차지하는 거 같은데 어떻게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 수 있지? 무겁지 않을까?
처음 보는 수상비행기에 호기심 딱지가 무궁무진하게 생겨났다. 혼자서 열심히 생성한 궁금증에 관한 답변은 미궁 속에 묻어두며 물 위에 동동 떠있는 산책로를 걷기 시작했다.
고요하게 흐르는 은빛물결이 찰랑거린다.
도심에 있지만 자연이 더 가까운 이곳은 온 세상의 화려한 색감이 빠져버려서 채도가 낮은 회색물감을 칠한 모습이다.
그래서일까? 서늘한 공기의 적막한 도시는 감정까지 차분하게 만든다. 마음에 여유가 생긴 나는 지금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산책을 즐겼다.
거대한 자연을 바라보는 곳엔 빼곡히 들어선 빌딩숲이 있다. 세상의 모든 색이 몽땅 빠져버린 도시에 오직 단풍잎만이 선명한 색을 입고 있었다.
단풍나무를 제외한 그 어떤 빛도 허락하지 않는 도시는 강렬한 태양은 물론 황홀한 석양빛도 꽁꽁 감췄다. 오묘한 경관에 푹 빠져서 끝없는 모험을 하다 보니 어느새 '캐나다 플레이스(Canada Place)'에 도착했다.
이렇게 멀리까지 걸을 생각은 없었는데...
앞으로 걸어갈수록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은 점점 멀어지지만 이미 은빛도시에 매료되어 버린 나는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보기로 했다.
드물게 한 두 명씩 걷거나 홀로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는 사람이 전부였던 모습은 어느새 활기차게 주말저녁을 보내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다. 느리게 뛰던 심박수가 되살아났다.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며 운동할 수 있는 헬스장이 눈에 띄었다. 전체가 통유리로 되어있는 곳엔 러닝머신이 줄지어 놓여있었다. 저곳에서 뛰면 어떤 기분이 들까? 조그만 화면으로 원하는 프로그램을 보며 달리는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일요일 오후, 사람들 속에 파묻힌 채 거리를 걷고 있는 중이다. 여전히 색을 잃어버린 자연은 병풍처럼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어둠이 조금씩 내리면서 잠시 비추었던 희미한 빛줄기도 점차 내려앉고 있었다.
모두가 어디론가 바삐 걷고 있는 발걸음을 따라서 걷다 보니 'Flyover'라는 놀이기구가 나타났다. 즐거운 표정을 한 사람들은 놀이기구를 타러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호기심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홀로 4D어트렉션을 체험할 자신이 없기에 가만히 지나쳐서 안쪽으로 계속 걸어갔다.
아무도 없는 이 길의 끝에 오롯이 홀로 서 있었다.
반대편에는 빌딩숲이 새로운 배경화면으로 나타났다. 하나 둘 불빛이 켜지는 건물들 사이에서 유난히 반짝이는 '밴쿠버 룩아웃(Vancouver Lookout)'이 보였다. 주위에 있는 건물들과 조화롭게 어우러진 모습이 인상적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순간의 정적이 좋다.
여행을 가면 나의 하루는 항상 유명한 관광지를 쫓느라 바빴었다. 스케줄에 치이고 늘 시간이 빠듯했던 지난날들과 달리 그저 길을 따라 걷기만 해도 여행이 되는 지금이 좋다.
나도 모르게 은빛도시의 무채색 매력에 스며든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