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55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시애틀의 잠 잘 오는 밤

포기하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

by JULIE K Feb 14. 2025

이런, 늦잠이다!


꿈결 속을 헤매던 중 갑자기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직감적으로 늦잠을 잤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페리 출발 시간까지 약 30분 정도 남아있었다. 상당히 애매한 시간으로 내면의 갈등이 시작됐다.


서둘러서 옷만 입고 뛰쳐나갈까? 날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준비다면 겨우겨우 발 시간에 맞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초행길이고 정확히 걸리는 시간을 가늠할 수 없기에 장담할 순 없다.


오늘은 나다 속 작은 유럽이라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도시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빅토리아'에 가는 날이다. 밴쿠버에서 가는 것보다 시애틀에서 가는 것이 훨씬 간편해서 일부러 여기까지 내려온 것도 있었다.


예약한 티켓값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돈을 위해서라도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서 무조건 선착장까지 달려야 한다. 하지만 밤새도록 켜져 있는 조명과 좀처럼 잠을 자지 않는 룸메이트들 때문에 함께 잠을 설쳤기에 잠시 꿈을 꾼 것처럼 다시 침대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건 꿈일 거야... 항상 계획대로 여행을 해 왔던 내가 페리를 놓 리 없...'


좀처럼 컨디션이 돌아오지 못하고 있던 나는 결국 잠을 택해버렸다. 순식간에 증발해 버린 거금 대신 단잠을 자면서 체력회복을 선택한 것이다. 머리보다 본능이 이긴 순간이다.


누가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라 하였는가!


숙면을 취한 뒤 두 번째로 맞이한 아침은 그 어느 때보다 몸이 가볍고 상쾌하다.



파란 가을 하늘,
Seattle


차가운 공기와 따뜻한 햇살이 함께하는 이곳은 완연한 가을이다. 맑고 청명한 하늘이 활짝 피어나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가을을 드디어 만날 수 있었다. 리셉션 직원의 말처럼 하루가 지나고 나니 거짓말처럼 쾌청한 날씨가 시작됐다. 빅토리아에 가지 못 해서 속상해할 내게 늘이 보낸 작은 선물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어젯밤 시애틀의 야경에 매료된 순간부터 이미 빅토리아에 대한 미련이 사라졌는지도 모르겠다. 작은 도시라 볼 것이 별로 없을 거라 쉽게 판단한 내 착오가 가장 크다.


포기한 것이 있다면 얻는 것도 있는 법.

오늘 나는 누구보다 시애틀을 열심히 즐겨보리라!


이른 아침,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퍼블릭 마켓(Public Market)'이다. 밴쿠버에서도 첫 번째 여행지로 마켓을 찾았었는데, 아무래도 이번 여행의 콘셉트는 마켓투어가 되지 않을까 싶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브런치 글 이미지 2
undefined
undefined
undefined
undefined
undefined


길을 따라 쭉 걷다 보니 누군가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마켓 입구 쪽에서 남자 두 명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화창한 아침에 들려오는 음악소리가 기분을 들뜨게 했다.


과일가게 앞을 지나가면서 알록달록한 색감에 이끌려 잠시 멈췄는데, 과일 파는 청년이 사과 한쪽을 잘라줬다. 나도 모르게 받아 들고 한입 베어무니 그 맛이 상큼하고 달콤다.


커다랗게 쓰여 있는 퍼블릭 마켓 사인을 따라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싱싱한 해산물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는 수산코너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큼지막한 해산물은 영롱한 빛깔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가한 금요일 아침, 살랑살랑 불어오는 가을바람,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 혹은 악기연주소리, 부지런히 걸어 다니는 사람들, 지금까지 봐왔던 마켓 중 가장 생동감 넘치는 곳이다.


발걸음을 옮겨서 시애틀에 오면 꼭 가봐야 한다는 '스타벅스 1호점'을 찾았다. 바로 앞에 작은 공터가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특이하게도 어떤 할아버지가 전통악기로 보이는 기다란 악기를 연주하고 계셨다. 독특한 음색이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비둘기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할아버지의 연주소리를 듣고 있었다.


공터를 지나 스타벅스로 들어갔다. 저렴한 커피값에 눈이 즐겁다. 커피를 주문하고 이곳에 오면 꼭 한두 개씩은 사가지고 간다는 텀블러를 구경하고 있을 때 내 이름이 들려왔다.

undefined
undefined
undefined
undefined
undefined
undefined
브런치 글 이미지 14


따끈한 커피를 받아 들고 다시 공터로 나갔다. 저 멀리 바다가 보이는 낭만 가득한 벤치에 앉았다. 컵홀더에 내 이름이 적혀있었다. 예전에 올랜도로 가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햄버거를 주문했는데 영수증에 내 이름이 적혀있던 것이 생각났다.


번호가 아닌 이름을 불러주는 이 나라, 여전하구나... 커피가 유독 달콤하게 느껴진 것은 캐러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저기... 사진 좀 찍어 주시겠어요?"


홀로 앉아서 여유로운 커피타임을 즐기고 있을 때 지나가던 사람이 다가와서 사진을 부탁했다. 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서로의 기념사진을 찍어 주었다.



커피로 위장을 깨웠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식사를 할 차례다. 마켓을 지나오면서 미리 봐두었던 한국 음식점으로 갔다. 테이크아웃 전문 매장으로 메뉴 다양하게 있었다. 아저씨는 주문한 음식을 푸짐하게 꾹꾹 눌러 담아 주시면서 뒤로 돌아가면 뷰가 좋은 곳이 있다며 살짝 귀띔해 주셨다.


감사의 인사를 전하 소중한 도시락을 들고 뷰포인트로 향했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간단히 서서 식사를 할 수 있게 긴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undefined
undefined
undefined


"우와~~~~!!"


커다란 창문 너머 푸른 바다가 햇살에 반짝이고 하얀 구름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 있음에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여행 떠나와서 처음으로 먹어보는 한식다. 멋진 풍경을 벗 삼아한 그릇 뚝딱 해치운 뒤 다시 길을 나섰다.



야경은 여기에서,
Kerry Park


어젯밤 걸었던 길을 다시 걷고 있다. 같은 장소이지만 낮에 걸으니 또 다른 분위기였다. 잔뜩 말라버린 낙엽이 길가에 뿌려져 있었다. 바스락 거리는 경쾌한 소리가 듣기 좋아서 괜히 낙엽을 밟으며 걸어본다.

undefined
undefined
undefined
undefined
undefined
undefined


'이런 건물도 있었구나...'


어두워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새롭게 보이는 풍경에 새삼 감탄하고 있을 때 '스페이스 니들'이 코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길쭉한 타워는 어제와 또 다른 모습으로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었다.


오직 하늘에서 내리쬐는 일광만으로 온 세상은 반짝이고 있었다. 메말랐던 감정이 다시금 몽글몽글 피어났다.


찬란한 오후의 가을이다.


풍경에 흠뻑 빠져서 걷다 보니 어느새 오늘의 마지막 여행지인 '케리파크(Kerry Park)'로 가는 초입에 들어섰다. 거대한 언덕이 길 건너에서 맞이해 주었다. 한눈에 봐도 꽤나 높아 보이는 급경사다.


험난한 여정이 예고되었다.


저곳으로 올라가려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버스를 타면 쉽게 올라갈 수 있지만 이미 바로 앞까지 와있는 내겐 사치일 뿐이다. 천천히 한 걸음씩 옮겨나갔다. 운동이라고는 숨쉬기가 고작이었던 육신이 점점 힘에 부친다며 헉헉 대기 시작했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육중한 몸을 이끌고 겨우겨우 올라간 언덕의 중간지점에서 이정표를 발견했다.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다행히도 지금부터는 평지였다.


'휴~ 살았다.'


여행도 체력이 있어야 하지. 젊음이 선사한 건강을 공짜로 누리면서 살았던 탓에 소홀했던 운동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아주 심오했던 시간이었다.


혼자만의 사투를 끝내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길을 걸었다. 건물사이로 저 멀리 수평선이 이어졌다.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저택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역시 부자들은 높은 곳에 산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조금 걷지 않아서 잔디가 깔린 작은 공원이 보였다. 공원이라고 하기엔 소박한 규모지만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를 바라본 순간 그 생각이 쏙 들어갔다.


시애틀 도심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바로 이 경관을 놓치지 않으려고 달려온 하루가 헛되지 않았음을 실감했다. 은 곳에서 바라본 경 한가운데에는 내가 반한 '스페이스 니들'뚝 서있었다.


바로 이 그림이다! 내가 보고 싶었던 풍경화...


이제 막 내려오기 시작한 태양은 가장 아름답고 강렬한 빛으로 도시를 물들였다. 그림 같은 풍경을 배경 삼아 아이들이 뛰어놀고, 커다란 개들이 윤기 나는 털을 휘날리며 주인 손을 이끌며 산책하고 있는 모습은 더없이 따스했다.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그들을 쫓는 눈길이 바쁘게 움직인다. 오후를 만끽하는 사람들의 행복에 동화되어 내 얼굴에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홀로 여행할 때 아름다운 곳에서 인생사진을 남기고 싶다면 주변에 있는 사진 전문가에게 부탁하면 된다. 마침 커다란 장비를 갖춘 카메라를 삼각대에 올려놓고 시간대별로 사진을 기록하는 사진작가들이 주변에 여럿 있었다. 용기 내어 사진을 부탁한 덕분에 앙증맞은 나의 DSLR로도 멋진 인생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어느덧 하루종일 수고한 태양이 퇴근할 시간이 되었다. 끝없는 수평선 위로 격렬했던 붉은 노을을 선사하고 유유히 사라져 갔다.


해가 떨어지자 쌀쌀한 추위가 찾아왔다. 여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터라 얇게 걸친 재킷 하나에 의지한 채 오들오들 떨어야 했다. 숙소에 있는 패딩조끼가 그리워졌다.


차가운 밤공기가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있었다. 화려했던 햇살옷을 벗은 도시 역시 차갑게 식어버렸다.


'이제 그만 내려갈까?'


또다시 갈등이 시작됐다. 계속해서 기다리다 보면 어둠이 짙어지고 또 다른 빛이 밤하늘을 수놓을 것이다. 하지만 완전한 야경을 보기까지 시간은 좀처럼 흐르지 않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며 인내를 갖고 버티기 시작했다.

undefined
undefined
undefined
undefined
undefined
undefined


이곳에 올라온 지 약 두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도심의 야경을 볼 수 있었다. 감격이 벅차올랐다. 추위와 싸우며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파노라마는 나를 이곳에 오래도록 붙잡아 두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을 가슴깊이 새기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조심스레 옮겨본다.


깊어진 밤하늘에 걸어왔던 길도 어둑해졌다. 갓길에 주차한 차를 타고 내려가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의 전용 차량인 BMW(Bus, Metro, Walk)를 타기로 한다.


버스를 타고 자리에 앉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외국인이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시애틀에 여행 왔나요?".


"네, 조금 전까지 케리파크에서 야경을 보고 오는 길이에요."


내가 가진 BMW가 가진 장점이다. 바로 낯선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대화할 수 있다는 것. 그 사람은 취직을 준비 중인데 쉽지 않다며 신세한탄을 했다. 사람 사는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짧은 대화를 나누고 버스에서 내린  미리 봐두었던 식당으로 달려갔다.

undefined
undefined


진한 사골 육수의 맛이 일품인 돈코츠라멘. 추위에 얼어붙어 버린 은 따뜻한 국물에 금세 노곤해졌다.


집을 떠나온 지 4일 만에 진정한 여행으로 하루를 꽉꽉 채운 지금, 빅토리아에 대한 미련은 사라지고 애틀의 아름다웠던 가을만이 남아있다.

금요일 연재
이전 03화 섹시한 너에게 홀딱 반해 버렸네...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