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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시한 너에게 홀딱 반해 버렸네...

Seattle(Space Needle)

by JULIE K Feb 07. 2025

국경을 넘는 것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유럽에서 경계를 넘을 때마다 울려대는 핸드폰이 참 신기했었다. 핸드폰 기지국이 바뀌고 대사관에서 안전안내 문자가 온다. 짧은 시간에 세 나라를 넘나들 때면 핸드폰이 잠시도 쉬지 못하게 된다.



국경을 넘어서
Seattle, WA USA


어젯밤에 호주에서 막 도착한 키아라와 함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침식사를 하러 갔다. 메뉴라고는 딱딱한 빵과 두 종류의 시리얼, 음료, 커피뿐이었지만 새로 생긴 룸메이트와 여행이야기 꽃을 피우며 한가로이 아침시간을 즐겼다. 호주에 다녀온 이야기, 밴쿠버 여행 일정 등 공감 가는 이야기로 시간을 꽉꽉 채워서 보낸 우린 서로의 여행을 응원하며 각자의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은 밴쿠버를 잠시 떠나서 미국에 있는 '시애틀(Seattle)'에 가는 날이다. 지도상으로 볼 때 정말 가깝게 보였고, '빅토리아(Victoria)'로 가는 길이 훨씬 간편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예약했었다. 


머나먼 여정이 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 한 채...


눈치 없이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다. 버스를 타도 되지만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캐리어를 끌 용감하게 걸어가 본다. 메인 스트리트 역에 내려서 천천히 주위를 돌아 버스역을 찾았다. 다행히 시간은 약 5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대합실 안으로 들어가니 기자회견장처럼 방송국 카메라가 여러 대 설치되어 있었고 관계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 나라를 가던 항상 리포터가 방송 촬영하는 것을 목격했었다. 소수의 스텝이 움직이며 촬영하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규모가 꽤 커 보였다.


궁금한 마음에 조심스레 가까이 다가갔다. 커다랗게 걸려 있는 포스터에는 새롭게 바뀐 디자인의 5C$와 10C$ 화폐가 그려져 있었다.


'캐나다 지폐가 리뉴얼되는구나!'


그런데 왜? 생뚱맞게 버스터미널에서 기자회견을 갖을까? 통은 호텔 연회장 같은 곳에서 하지 않나? 뜻하지 않게 마주한 광경이 신기한 나머지 시선을 계속 뺏기고 있었다.


촬영 때문에 켜놓은 조명이 없다면 조용하고 작은 시골마을의 버스터미널과 비슷한 분위기일 것이다. 여기서 다른 나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다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주변을 어슬렁 거리다가 물이랑 간식을 사서 버스에 타려는데, 바로 앞에 있던 직원분이 여권과 짐태그를 보여달라고 했다.


짐태그?


아! 맞다. 잊고 있었다.


내가 가려는 곳은 캐나다 내 다른 지역이 아닌 국경 너머 미국이란 것을...


서둘러서 티켓부스로 달려갔다.


"버스가 출발하기 30분 전에는 와야 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몰랐어요."


러기지 체크인을 해주시는 분께 사정없이 죄송하다고 말하고 다시 뛰어서 버스에 올라탔다. 휴~~~!! 버스에 올라타니 세관신고서와 입국심사카드를 줬다.


이제야 국경을 넘는 것이 실감 났다.


어디론가 떠나려는 사람들을 태우고 버스는 서서히 부드럽게 출발했다. 하늘은 여전히 흐리다. 여행 와서 맑은 하늘을 보지 못했다. 간간이 단풍나무를 보긴 했지만 북반구에서 맞이한 가을은 전반적으로 차분하고 고요한 회색빛이다.


버스는 바로 하이웨이에 올랐다. 덜컹거리는 창문은 거대한 자연을 계속해서 비춰 주었다. 언젠가 세계지리 시간에 배운 것들이 생각났다.


광활한 자연은 지역마다 기온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내가 있는 지역의 위치를 알고 싶으면 숲 속의 나무를 보면 된다고 했다. 쭉쭉 곧게 뻗은 나무들이 빼곡히 자리한 이곳에선 침엽수가 많이 보인다. 날이 차고 일조량이 적다는 뜻이다.


뜻밖의 세계지리를 실시간으로 눈앞에서 감상하며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멀리 고속도로 요금소처럼 생긴 곳이 보였다. 지어 서있는 자동차 불빛이 별처럼 반짝였다.


드디어 국경에 도착했다. 


버스가 멈추고 사람들이 일제히 내리기 시작했다. 갖고 있는 모든 짐을 들고 줄 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버스터미널 매표소처럼 생긴 창구에서 하는 입국심사는 어디서도 경험하지 못할 진귀한 풍경이었다.



너의 첫인상은,
거센 비바람


미국에 도착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졌다. 분명 처음 가는 곳이지만 이전에 여행 왔던 경험들 덕분인지 도로 위의 이정표가 정겹게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버스는 다시 부지런히 달려서 도심 근처로 진입했다.


바로 눈앞에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버스는 교통체증으로 거북이 주행을 하는 중이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병목구간은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창밖에는 굵은 빗방울이 먼저 마중 나와 주었다. 중간에 잠시 그친 비로 시애틀에 오면 날이 좋아지지 않을까 했던 한가닥의 희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빗방울은 점점 거세게 창문을 두드렸다. 린 하늘 속에서도 저 멀리 시애틀을 상징하는 '스페이스니들(Space Needle)'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버스는 예상시간보다 30분이 지난 오후 4시 30분쯤 목적지에 도착했다. 캐리어를 받아 들고 숙소로 천천히 걸어본다.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나를 반겨준 것은 하늘에서 툭툭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과 거센 바람이었다.


바로 오늘 큰 자연재해를 겪었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거리의 이정표가 눈에 띄게 휘어져 있었다. 우산이 뒤집어질 것처럼 펄럭이는 탓에 더 이상 우산을 쓰는 것이 의미가 없어졌다.


모진 비바람을 견디며 정면돌파하기로 결심한 나는 손에 겨우 붙들려있던 우산을 접어서 가방에 넣고 모자를 뒤집어쓴 채 숙소까지 길을 걸었다.


아뿔싸... 지난 런던 여행 때 느꼈던 익숙한 기분이 싸하게 엄습했다. 역시나! 앞만 보고 직진하느라 목적지를 두 블록이나 지나쳐 왔다.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서 겨우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많이 피곤해 보였는지 직원은 내일부터 날이 좋아질 거라는 긍정적인 말과 함께 친절 체크인을 도와줬다.


정말이지 내일은 눈부신 햇살을 보면 좋을 것 같다.



섹시한 너에게 반하다,
Space Needle


숙소에 대충 짐을 던져놓고 거리로 나왔다. 장시간 버스를 타고 오는 바람에 종일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배고픔에 굶주린 나는 거리에서 식당만 빠르게 찾았다. 


밥을 먹고 싶었는데 초밥집에는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별 수 없이 몇 걸음 더 가다가 발견한 이탈리아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홀로 덩그러니 앉아 있는 텅 빈 식당 안 한쪽에서는 할아버지가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외롭지 않게 식사를 마칠 수 있었기에 소정의 팁을 내고 나왔다. 거리엔 벌써 어둠이 깔려 있었다.


'시애틀은 밤거리가 위험하다고 들었는데...'


걱정하는 마음과 달리 멀리서 보이는 타워의 빛에 홀린  어둠 속을 걷기 시작했다. 거리엔 인적이 없어 조금 두려웠지만 대로 숙소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수화물을 가득 실은 위장이 운동을 해야 한다고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다.


반짝이는 스페이스니들에 의지하며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코 앞에 타워가 나타났다.


'우와~~~!!'


가까이에서 본 타워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세계를 여행하며 수많은 타워를 봐왔지만 가장 영롱하고 섹시한 자태에 한눈에 반해버렸다.


가늘고 길게 우뚝 솟아있는  몸체는 부드러운 곡선으로 한껏 우아함을 뽐내고 있었다. 맨 위에 올려진 동그란 전망대는 한 송이 꽃을 피운 것처럼 보였다.


입장이 마감되기 전에 서둘러서 티켓을 끊고 안으로 들어갔다. 늦은 시간이지만 시애틀의 야경을 보기 위해 달려온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서 마저 혼자일까 봐 걱정했는데 안심이 됐다.


전망대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흔히 볼 수 있는 화려한 LED영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 투명한 문으로 바깥풍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자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함께 탄 안내원이 밝게 인사를 하고 이곳에 관해 간단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계 음성이 아닌 사람의 목소리로 안내받고 직접 소통할 수 있어 친근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기념사진을 찍어준다. 궁금해서 바로 사진부터 찾아봤다. 얼떨떨한 채 찍힌 표정에서 애써 웃어 보이려는 억지미소가 보였다. 혼자 여행 다니면서 사진을 남길 기회가 잘 없으니 퉁퉁 불어 터진 얼굴이라도 고이 모셔가겠다며 흔쾌히 결제했다.


마지막으로 사진을 메일로 전송하고 나서야 드디어 전망대 안을 차분히 둘러볼 수 있었다.


문을 열고 전망대 밖으로 나가봤다. 귓전에서 바로 울리는 바람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세차게 불어 온 매서운 가을바람에 깜짝 놀라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역시 아무도 가지 않는 곳엔 이유가 있었다.


잔잔하게 들려오는 음악은 바깥세상을 완벽하게 차단해 줬다. 여유롭게 이 밤을 즐기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행복이 묻어났다. 전망대 안은 그 어느 곳보다 아늑다. 


혼자지만 씩씩하게 창밖으로 뿌려진 반짝이는 빛을 바라봤다. 세상은 온통 별천지로 가득했다. 정말이지 우주에 올라가면 이런 기분일까? 오렌지빛으로 가득한 지구는 세상만사 걱정 없이 흘러가고 있는 듯했다.


황홀하다.

일생에 가장 아름다운 로맨틱한 밤이다.


리듬을 타고 들려오는 재즈가 어우러지니 모든 것이 완벽해졌다. 딱 하나만 빼고!


온전한 그림 속에 스페이스 니들이 빠져있었다. 이미 나는 그곳에 올라와 있지만 막상 이 아이의 섹시한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문득 시애틀이 궁금해졌다. 이 작은 도시는 어떤 곳인가? 내일은 빅토리아에 가기로 예약되어 있는데 온 신경은 이곳 집중되어 있었다.


'비싼 돈 주고 예약한 크루즈를 포기해? 아니야, 그럴 순 없어!'


내면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고민이 된다. 아... 모르겠다. 내일의 일은 '내일의 나'에게 맡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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