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ncouver
기나긴 하루가 지나가고 또 다른 날이 밝았다. 무사히 깨어났다는 것에 감사한 아침이다. 천천히 외출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섰다. 캐나다에서 이틀 만에 하는 첫 외출이다. 얼마 만에 맡아보는 바깥공기인지... 이제야 숙소 주변에 있는 건물들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네가 이렇게 생겼었구나...'
새삼스럽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찬바람이 불어왔다. 겉옷을 단단히 여미고 한 걸음씩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붉은 단풍의 왕국
Canada
계속해서 걷고 있는 거리엔 차들만이 쌩쌩 달릴 뿐 인적이 드물었다. 오늘 아침 산책코스는 '그랜빌 섬(Granville Island)'으로 정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택시로 가기도 하지만 무작정 걷고 싶었던 나는 운동화를 신은 튼실한 두 발로 무거운 걸음을 옮기고 있는 중이다.
얼마 걷지 않아서 큰 다리가 나왔다. 아무도 없는 다리 위를 건너가려고 하니 약간의 두려움이 밀려왔다. 가는 길은 분명 정확한데 광활한 도시에 혼자 떨어져 있으니 무서울 만도 했다. 바람이 제법 불기 시작했고 가로등에 걸려있는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었다.
거센 바람에 다리가 출렁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직 기력회복이 더뎌서 생긴 착시현상일 것이다. 무심코 다리 밑으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봤다. 고층빌딩 사이로 붉게 물든 단풍나무들이 눈에 띄었다.
"우와~~~!!"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되어 다리를 건너는 것을 잊어버린 채 그곳에 서서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캐나다는 가을 단풍이 예쁘기로 유명하다. 깊어진 가을과 겨울 사이 어디쯤에 있는 지금 사실 단풍은 포기하고 왔었다. 단풍시즌엔 비행기값도 비싸고 실제로 원하는 시간대의 좌석을 구하기 쉽지 않아 시즌이 지난 뒤로 일정을 잡았었다. 급하게 결정하고 무작정 떠나온 여행인지라 그냥 어디든 가자 하는 심정으로 이 먼 곳까지 아무 생각 없이 날아왔다.
별 기대 없이 떠나 온 내게 드문드문 아직도 붉게 물들어 있는 단풍은 선물과도 같았다. 무미건조했던 아침이 가장 화사한 색으로 피어났다.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바닥을 찍었던 몸속 에너지도 함께 솟구쳐 올랐다.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걷고 있으니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무거웠던 발걸음이 조금씩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이 모든 풍경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로지 나만을 위해 펼쳐진 것이다.
세상 단순한 어린아이가 된 아줌마는 따뜻한 경치에 마음이 녹아 단숨에 그랜빌 섬까지 도착했다. 길 위에는 이제 막 떨어진 싱싱한 단풍잎이 레드카펫처럼 깔려있었다.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주저앉아서 낙엽을 바라봤다. 단풍왕국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단풍잎은 어찌 생겼는지 그 모양과 색이 신기해서 한참 동안 관찰했다. 수분을 한껏 머금은 낙엽은 촉촉한 상태였다. 폭신한 붉은 카펫을 사뿐히 즈려밟으며 가만히 걸어본다.
파란색으로 염색한 여자가 벤치에 덩그러니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녀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이는 것은 오직 나만의 생각이다. 뒤에 있는 건물의 문이 파란색인 것은 아마도 우연일 것이다. 그림 같은 풍경에 자연스레 스며든 모습이 아름다워서 나도 모르게 카메라셔터를 눌렀다.
눈에 보이는 모든 순간들을 사진으로 채집하면서 가장 크고 유명한 '퍼블릭마켓(Granville Island Public Market)'으로 발길이 이어졌다.
문을 열고 들어간 그곳에는 각종 신선한 과일과 야채, 생선, 고기등이 진열되어 있어 볼거리가 가득했다. 소복이 담겨있는 과일과 큼지막하게 잘려있는 연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제법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에 홀리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 살고 있다면 분명 한가득 장을 봤을 것이다.
한참을 눈으로만 먹거리를 감상하다 보니 배가 출출해졌다. 그러고 보니 아침도 거른 채 걷고 있었다. 가까운 푸드코트에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기로 했다.
마켓 한가운데 있는 공간에는 사람들이 테이블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다행히 붐비지 않아 자리를 잡고 앉았을 수 있었다. 오늘의 첫 식사는 태국음식이다. 볶음밥과 야채, 덤플링 1개가 나왔다. 배가 고팠던지라 눈 깜짝할 새 한 그릇을 뚝딱 비워냈다.
인간의 본능인 배고픔을 해결하고 나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섬을 조금 더 둘러볼 생각으로 근처에 있는 '키즈 마켓'을 찾았다. 아이들을 배려한 낮은 높이의 문이 눈에 띄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예쁜 장난감과 옷, 책들이 가득했다. 상대적으로 사람이 많지 않아 차분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집는 물건마다 비싸서 다시 곱게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흥미가 없어진 나는 근처에 있는 '키칠라노(Kitsilano)'에 가보기로 했다. 섬을 빠져나와 쭉 뻗은 W.4th.Ave 길을 따라서 걸었다.
흐린 하늘이 점차 개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바람일 뿐이었다. 하늘은 나와 밀당 중이었다. 햇살이 허공을 가르며 내리쬐는 듯했지만 아침부터 흐린 하늘은 좀처럼 쨍하고 맑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하늘색이라도 예뻤으면 좋으련만...'
손에 들고 있던 카메라로 연신 셔터를 눌러댔지만 좀처럼 기운이 나지 않았다. 찍는 사진들이 색을 제대로 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으로 이 길을 감상하자고 생각하며 두어 걸음 걸어가다가 나도 모르게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혼자 느릿느릿 걷고 있자니 할 일 없는 동네 백수처럼 보일 것 같고 평소 걸음대로 걸으면 건물들을 쌩 하고 지나치게 되니 기억에 남는 것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벌써 혼자 하는 여행은 2회 차지만 낯선 곳을 걷는 것은 여전히 어색하기만 하다. 그래서일까? 캐나다에 오면 꼭 들러서 구경하리라 했던 요가복 매장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거리에 지나치며 무수히 많은 매장들과 커피숍, 레스토랑도 관심 밖이었다.
컨디션이 좋아졌다고 했지만 모든 것을 신기하고 즐겁게 바라보던 긍정에너지까지 끌어올리지는 못했나 보다. 목적지를 잃은 사람처럼 그냥 정처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거리엔 상점들이 사라지고 대규모 주택들이 늘어서있었다. 일자로 곧게 뻗은 길을 따라 제법 큰 집들이 한채, 두채... 제각각의 모습으로 정갈하게 늘어서 있었다. 어쩌다가 한 명씩 거리를 거닐 뿐 동네는 고요했다. 길가에는 아직 잎이 떨어지지 않은 단풍나무들이 줄지어 있었다.
낯선 동네에서 맞이한 완연한 가을이다.
그 쓸쓸함이 온기를 타고 마음속까지 전해졌다. 걷는 사람이 얼마 없어서일까.. 거리에 떨어진 낙엽들이 뽀송뽀송하다. 11월의 첫째 주를 지나고 있지만 아직 핼러윈 장식을 치우지 않은 집들이 꽤 있었다. 유일하게 관심을 갖고 구경한 것들이다.
뜻하지 않게 외로웠던 어느 가을날의 산책을 뒤로하고 사람들이 많이 있을 다운타운으로 이동하기로 하고 방향을 틀었다. 다행인 것은 걸으면 걸을수록 몸이 가벼워지면서 조금씩 힘이 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언덕 아래로 보이는 길 끝에 아련히 공원이 보였다. 순간 내려가 볼까? 하는 충동이 일었지만 내 기운은 그곳까지 닿지 못했다. 아직 체력을 온전히 회복하지 못한 것을 인지하고 있던 마음이 가지 말라고 붙잡았다.
밴쿠버에 오면 다들 한 번씩 찾는다는 '증기시계탑(Gastown Steam Clock)'이 눈앞에 있다. 놀랍게도 도착하자마자 앙증맞은 시계는 멜로디 소리를 내며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일제히 발길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봤다. 귀여운 증기시계탑이 소리를 멈췄다. 오직 이것 하나만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면 허무했을 수도 있겠다.
사람들이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 다니고 있던 도심은 생각 외로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날이 흐려서 더욱 그렇게 느낀 것일 수도 있겠다. 단풍나무로 화려하게 장식된 기념품 가게를 스리슬쩍 둘러봤다. 우리나라에서 명품 구스로 유명한 캐나다구스 제품들이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외국에서 백화점을 구경할 때마다 든 생각은 우리나라에서는 애지중지 전시하고 고급스럽게 포장해서 파는 물건들을 도난방지 태그만 달아 놓고 갑판대에 아무렇지 않게 올려두고 판매를 한다는 것이다. 놀랍도록 다른 문화의 차이다. 사실 세일하는 물건들을 우리나라보다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지만 떨이로 판매하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결국 아무것도 사지 않은 채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밴쿠버에서 맞이한 둘째 날이자 처음으로 한 산책은 적막하고 쓸쓸했던 짙은 붉은색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