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야.
또다시 대이동의 날이 밝았다. 오늘은 밴쿠버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사진으로만 열심히 만났던 '빅토리아(Victoria)'도 이젠 안녕이구나...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올까? 미국에 와서 캐나다를 찾다니, 아이러니하다.
무리하게 일정을 계획한 과거의 나에게 따지고 싶은 심정이지만 이렇게라도 시애틀에 와서 완벽한 여행을 했으니 어찌 보면 무모하기만 했던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의미 없는 후회는 훌훌 털어버린 채 마지막의 시애틀을 눈에 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해를 품은 바다
숙소 앞에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 방향은 둘 중 하나다. 하지만 어디로 가든 멀리 가지는 못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선택은 '가보지 않은 길'이다.
이제는 익숙해진 이 동네, 여전히 인적이 드문 길은 고요하지만 해가 떠 있는 아침이 훨씬 활동적으로 느껴진다. 바다내음이 솔솔 나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반듯반듯한 건물들 사이로 수평선이 보였다. 저 멀리 은갈치처럼 반짝이는 물결들이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어디선가 많이 본 그림이다. 브라이튼에서 지낼 때도 항상 이 풍경을 보면서 걸었었다. 저 바다가 늘 그 자리에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내겐 기쁨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너머로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설렘을 안겨 주었다.
아주 먼 옛날 지구가 크고 둥글다는 것을 몰랐더라면 과연 나는 저 수평선 끝을 향해 계속 달려가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저곳이 끝이라 생각하며 그저 바라보는 것에 만족하며 살고 있지는 않았을까...
아무렴 어떠한가! 이 상쾌한 바다내음을 맡으며 아무도 없는 길을 걷고 있는 지금,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온통 내 것인 것을... 바다를 향해 언덕길을 내려가는 발끝이 솜털처럼 가볍다.
그렇게 달리기 시작해서 두발이 멈춰 선 곳은 '피어 66'. 어제 아침 이곳에서 티켓을 확인받고 수평선을 넘어섰어야 했던 곳이다. 아... 정박해 있는 배들을 보니 괜스레 마음이 아려온다.
내가 버린 티켓 값어치, 그 이상의 것을 보고 경험했지만 원래 계획대로 갔었더라면 나의 어제는 다른 역사를 갖게 되겠지 라는 미련이 또다시 고개를 내민다. 한낱 어리석은 인간이기에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착잡한 마음을 달래며 뒤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빅토리아와는 인연이 아니었던 거야...'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하며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잔잔한 물결 위로 반짝이는 것이 눈에 띄었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품은 바다였다.
보통은 햇살이 물결에 부서지며 보석 같은 윤슬을 뿌리는데 동그란 해님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생경한 모습에 한동안 시선이 머물렀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이다. 아침을 부지런히 보낸 보람이 있었다. 행여 구름이 가려버릴까 열심히 카메라에 이 순간을 가둬본다.
숙소를 기준으로 며칠째 주위만 빙글빙글 돌고 있지만 내가 가는 길에 따라 보는 풍경이 참으로 달랐다. 위에서 내려다본 시선이 오늘은 아래에서 위로 향하고 있다.
저 멀리 가지런히 늘어선 주택단지가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동네주민이 된 기분이랄까? 강아지를 산책하는 아주머니, 러닝을 하고 있는 아저씨 등 지나가는 사람들이 반갑다.
자연스레 마켓으로 향한 나는 아침식사로 베이글 샌드위치를 구입했다.
아무렇지 않게 벤치에 앉아서 눈앞에 펼쳐진 경치를 벗 삼아 베이글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이 상황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시애틀에서 마지막이 될 아침은 평화롭고 행복했다.
잔잔했던 여행에
큰 돌
진정한 가을을 만끽하고 가는 시애틀과 마지막 인사를 하고 다시 밴쿠버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저 멀리 스페이스 니들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우뚝 솟아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 진짜 마지막이구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하고 싶은 거 다 했던 시애틀은 평생 낭만의 도시로 기억될 것이다. 창밖을 보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열심히 달린 버스는 휴게소에 잠시 정차했다. 바깥바람을 쐬며 구경하다가 물과 초콜릿을 샀다. 에너지를 보충하는데 이만한 게 없다며 맛있게 먹었다.
그렇게 아무 일 없이 버스는 다시 출발했고 여전히 창밖을 보며 스쳐 지나가는 의미 없는 나무들에 시선을 두고 있을 때였다.
이상하게 기분 나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랫배가 살살 아파오는 것이 처음 갖는 통증이 아니었다.
'맙소사!!'
이것은 분명 밀가루와 초콜릿만 먹어서 열받은 위장이 배탈 났다고 보내는 신호였다. 위험을 감지한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버스 안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하지만 저곳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 안에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음 목적지인 세관신고를 하는 국경에 도착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창밖에 보이는 이정표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시간상 곧 도착할 것이다. 그래 차분하게 생각하자. 온 힘을 다해 최대한 신경을 분산시켰다. 머릿속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상 시나리오를 그려봤다.
국경에 도착한다.
운전기사 아저씨한테 화장실 위치를 물어보고 잠시 다녀오겠다고 양해를 구한다.
좋아, 좋아! 할 수 있어!!!
저 멀리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국경지역에 도착한 것이다. 희망이 생겼다. 그런데!
'나 내릴 수는 있는 거야?'
내 상황은 상당히 긍정적이지 못했다. 줄지어서 멈춰서 있는 버스를 기다릴 수 없는 모양이다.
어떡하지? 내리면 짐을 찾고 그걸 들고 이동해야 하는데... 그런데 바로 화장실은 갈 수 있는 걸까?
시애틀에 올 때 사람들이 줄 서서 세관검사를 했던 게 생각났다. 그 이동 동선에 화장실을 봤던 기억이 없다.
'아니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데 화장실이 왜 없겠어. 하지만... 여기는 공항이랑 다르잖아!'
낯선 곳이 주는 공포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는 듯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버스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인다.
'젠장, 망했다!!!'
부들부들 떨며 온몸에 힘을 줘봐도 이미 한계에 다 다른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아무것도 없었다.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지면서 점점 이성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고통의 몸부림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고, 그 어떤 생각도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어서 오시게...'
순간 뒤에 있는 화장실을 바라봤다. 환청이 들려온다. 점점 미쳐가고 있는 걸까?
저 멀리 천국으로 향하는 문처럼 빛이 보였다.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세상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평온 해질 것이다.
해우소(解憂所) : 모든 번뇌와 근심이 사라지는 곳.
버틸 수 있는 힘이 다 떨어져 버린 나는 가방에 여행용 티슈가 있는 것을 확인한 뒤 빛의 속도로 달려갔다.
하......
밖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내리는 모양이다. 자연적인 현상을 배출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노크소리가 들렸다.
"안에 누구 있어요? 문 좀 열어봐요."
문고리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 잠시만요! 제가 지금 바로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요.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무슨 일 있어요? 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 당장 나오세요."
"저도 알아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 배가 너무 아파서요.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FBI? CIA?? 아니면 완전 무장한 경찰관...???
밖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구지? 순간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수많은 생각들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마약밀수, 불법체류 등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범죄에 연루되는 건가? 나 잡혀가는 거야?
아...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보다. 오만가지 생각 중 그래도 지금 떠오르는 것은 오직, 창피하다는 것이다. 잔뜩 긴장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살며시 문을 열고 나갔다. 내 표정은 거의 울기 직전이다.
"정말 죄송해요. 제가 배탈이 나서 어쩔 수 없었어요."
파란색 제복을 입은 덩치 큰 남자 두 명이 서있었다. 겁이 났지만 어떻게든 살아볼 용기로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놨다.
하... 이대로 연행되는 건가... 집에는 갈 수 있겠지...?? 두려움이 앞서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밖에 있는 캐리어가 당신 것 맞죠? 미안하지만 조사에 협조해 주셔야겠어요."
그들은 나를 데리고 건물 안쪽으로 굽이굽이 들어갔다. 모든 것을 체념하듯 고개를 푹 숙이고 따라갔다. 머지않은 곳에 경찰처럼 보이는 남자와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는 길에 무전을 주고받던 사람들인 거 같다.
그들의 얼굴조차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안 났다. 수치스러움이 밀려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나를 연행해 간 사람들처럼 덩치가 크지 않고 인상이 평온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남자는 여권을 보여달라고 했다. 가방을 뒤적거리고 여권을 꺼내며 누가 시키지도 않은 최후의 변론을 하기 시작했다.
"정말 죄송해요. 조금 전에 초콜릿 한 개를 먹었는데 갑자기 배탈이 심하게 나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그것뿐이에요. 다른 건 없어요."
명백하게 저지를 죄가 있다면 버스 안에 있는 공용화장실을 이용한 것뿐이다. 하필이면 국경지역에 도착한 시점에 말이다.
하지만 긴박했던 상황에서 정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것이 죄라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애초에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만든 것이 아닌가?
정신을 조금씩 차리기 시작하면서 혹시 모를 만반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 최후의 발악이라도 해봐야 하지 않나!
여자는 웃어 보이며 캐리어를 살펴봐도 되겠냐고 했다.
나는 지퍼를 열고 가방을 활짝 열어 보이며 마음껏 보시라고 했다. 내 안에 숨어 있던 또 다른 자아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결백하니까 당당하게 나가기로 했나 보다.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옷가지를 들춰보더니 몇 가지 질문이 오고 갔다. 어디서 왔냐, 어디로 가는 중이야, 한국으로는 언제 돌아가냐 등등.
될 대로 되라며 기세등등하게 가방을 활짝 펼쳐 보이던 나는 다급하게 저자세로 행동을 고쳐 잡고는, 미리 작성해 온 여행계획표와 호텔바우처, 비행기여정표를 보여주면서 진실된 여행객일 뿐임을 어필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아무리 급해도 버스 안에서 No.2는 하면 안 돼요. 저기에는 배수장치가 없기 때문에 가벼운 N0.1 용도로만 이용하는 곳이에요. 별다른 문제점이 없으니 이만 차로 돌아가도 좋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진짜로 몰랐어요. 배가 너무 아파서 끝까지 참을 수가 없었어요.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끝났다.
무사히 돌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과 버스에 돌아가서 사람들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민망함이 함께 몰려왔다. 최대한 고개를 숙인 채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아저씨도 한마디 하셨다.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죄송합니다. 정말 몰랐어요."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이대로 땅속 깊은 곳으로 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누군가 인생에서 가장 지우고 싶은 순간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바로 대답할 것이다.
바로 지금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