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A
무더운 여름날, 본격적인 휴가시즌이 찾아왔다.
직장인들의 휴가기간(남편 휴가)을 통으로 쓸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눈치껏 적절한 타이밍을 낚아챈 결과 나는 지금,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공항 한가운데 서 있다.
저마다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체크인 카운터를 찾느라 정신없이 바쁘다. 시간이 촉박하진 않았지만 이대로 멍하니 있다간 줄만 서다가 끝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재빠르게 체크인 카운터로 달려갔다. 역시나 카운터 앞에도 줄을 선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뉴델리에서 경유하시는 거죠? 시간이 빠듯하네요. 공항이 커서 도착하면 꼭 바로 환승구역을 찾아가셔야 해요."
"네??"
뉴델리에서 머무는 시간은 대략 2시간... 대기시간이 짧아서 좋다고 생각했는데 지상 승무원이 거듭 시간을 강조하니 조금 불안해졌다.
승무원은 도착하면 곧장 안내데스크부터 찾아가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며 보딩패스를 발권해서 줬다. 얼떨떨하게 티켓을 받아 들고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다시 고된 줄 서기를 시작하러 달려갔다.
출발 전부터 늘 정신없는 곳이 공항이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게이트를 찾아갔다. 날이 더우니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헐떡 거렸다. 마지막으로 줄을 서서 기내에 탑승했는데 웬걸 좌석 자리가 맨 앞쪽에 있었다. 자리 뽑기에서 승자가 된 나는 꽤나 흡족한 표정으로 자리에 착석했다.
오랜만에 국적기를 타서 마음이 편안한지 이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단잠에 빠졌다.
요즘엔 출발 전 좌석을 미리 정할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좌석 선정의 권한은 지상 승무원에게 있었다. 복불복이라 보딩패스를 받아 들면 제일 먼저 좌석번호부터 찾아보던 시절이었다.
배려가 불편할 때
약 8시간을 날아서 뉴델리에 착륙했다.
착륙바퀴가 무사히 활주로에 안착해 게이트까지 부드럽게 미끄러져가는 동안 사람들은 일제히 안전벨트를 풀고 선반 위에 올려둔 짐을 내리느라 분주했다.
잔잔하게 들려오는 클래식과 상반된 분위기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쳤다. 선반 위에 올려둔 짐도 없고 통로에 미리 나와서 서있지 않아도 되는 난 여유롭다.
비행기가 완전히 멈추자 문이 열리고 인도인 경비원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난생처음 일어난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11A, 11A!!"
경비원은 누군가를 애타게 찾았다. 누구지? 범죄자라도 탄 건가? 위급 상황이 발생했나?
경비원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나 난... 잘못한 게 없는데... 당황한 나의 눈동자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경비원은 내게 성큼성큼 다가와서 최종 목적지를 확인하더니 따라오라고 했다. 환승시간이 촉박한 내가 엉뚱한 곳에서 헤맬까 봐 데리러 온 것이었다.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쉼과 동시에 뜻하지 않게 특별 대우를 받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경비원의 뒤를 한참 동안 따라갔다. 트랜스퍼 라운지에 도착하자 의자에 앉아서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주위를 둘러보며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잠시가 될 줄 알았는데 5분이 10분이 되고 시곗바늘은 하염없이 돌고 있었다. 설레던 마음도 잠시 어딘지도 모를 곳에 홀로 덩그러니 앉아 있자니 점점 두려움이 몰려왔다.
계속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건가? 다음 비행기의 출발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데 아무런 조치가 이뤄지지 않으니 불안해졌다. 이렇게 방치해 둘 거면 왜 나를 여기로 데리고 온 거지? 별의별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약 40분 정도 시간이 지나서 나타난 직원은 내 짐을 찾아야 한다면서 여권과 티켓, 짐태그를 가지고 갔다.
어리둥절한 나는 또다시 기다려야만 했다.
아는 사람도 없는 곳에서 앉아 있는 것 밖에 할 수 없으니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창살 안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한 푼이라도 아껴보자고 직항을 포기한 것이 후회됐다.
"러기지를 찾지 못했어요. 아마 최종 도착지까지 바로 간 거 같네요."
잠시뒤에 다시 온 직원은 보딩패스를 내밀며 바로 탑승게이트로 가라고 했다. 이미 내 비행기의 출발 시간은 지난 뒤였다.
짐태그에 러기지의 여정이 기록되어 있을 텐데... 그게 바로 조회가 안 되는 걸까? 꼼짝없이 한 시간이나 허비한 것이 억울했다.
이들이 내게 베푼 친절이 불편해진 순간이었다.
하릴없이 신세한탄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다. 탑승시간이 지난 만큼 마음이 조급해졌다.
나... 비행기 탈 수는 있겠지?
걱정되는 마음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게이트는 또 왜 이렇게 멀리 있는 거야... 바람처럼 쌩~~! 지나치는 와중에도 주변 풍경을 재빠르게 스캔하느라 정신없었다.
모던 인디아. 휘황찬란하게 꾸며진 상점들이 정말 예뻤다. 여기가 원래 이렇게 좋았었나?
Indira Gandhi International Airport
참으로 인연이 없는 곳이다. 예전에 인도 여행을 왔을 때가 생각났다.
사상 초유의 짙은 안개로 항공기들이 쉽게 착륙하지 못해 상공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안개로 인해 밖이 보이지 않지만 창밖으로 해가 들어왔다가 그림자가 지기를 반복하는 것이 분명 같은 자리를 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는 상공을 돌고 있는 여객기가 여러 대가 있음을 말해준다. 하늘에서 그림자가 생길 일이 없지 않은가? 난생처음 겪는 일에 초조해진 나는 수첩을 꺼내서 당시 상황을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보다 더 생생하게 기억하기 위해서...
다행히 비행기는 뉴델리가 아닌 뭄바이까지 날아가서 무사히 착륙했고 일정에 없던 공항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었다.
당시의 잊지 못할 에피소드에 조금 전 상황까지 더해지니 그다지 좋은 기억으로 남지는 못할 것이다.
과거의 회상을 뒤로한 채 헐레벌떡 뛰다 보니 어느새 게이트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아직 탑승 전이었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탑승 게이트가 열리기를 기다렸다.
아아... 한 번의 기적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이번에 배정받은 좌석은 가장 안전하지만 소음이 엄청나다는 꼬리칸 맨 뒤쪽 정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소심한 나는 화장실도 한 번 가지 못한 채 약 7시간 20여분의 비행을 버텨냈다. 내 무릎 관절의 위력을 새삼 깨달으면서...
인고의 시간을 이겨내며 졸다 깨기를 반복하다가 드디어 오전 5시 30분, 현지 날씨를 예보하며 무사히 착륙했음을 알리는 기내방송이 들려왔다.
랜딩카드도 쓰지 않고 단 한마디의 인터뷰도 받지 않은 채 묵묵히 입국심사를 마치고 도착한 곳은 '오스트리아 빈(Wien)'이다.
그렇게 또 다른 하루가 지금 막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