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Festival
빈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출발한 여행은 오후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운 좋게 동행자를 만나서 함께 했지만 이제부턴 혼자서 다녀야 한다.
숙소에 있는 여행책과 지도가 생각났다.
'이젠 지도를 대신 봐줄 사람도 없는데... 그냥 가서 책을 챙겨 올까?'
살짝 고민됐지만 발길 닿는 대로 걷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일요일이라 문을 연 상점들이 많지 않아 거리는 한적했다.
Kärntner Str. 를 따라서 쭉 걸어 올라가니 '슈테판 대성당(Domkirche St. Stephan)'이 나왔다. 시내 한가운데 자리한 성당은 카메라 앵글에 전체를 담기 힘들 정도로 크고 웅장했다.
하늘로 솟구칠 것 같은 인상적인 첨탑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내부를 구경하기 위해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화려한 모습의 본당이 시선을 끌었다. 신성한 곳에 있으니 마음이 차분하게 정화되는 기분이 든다.
유럽에서 성당은 손쉽게 떠날 수 있는 타임머신이다. 박물관에 보관된 유물을 통유리 너머로 보는 것과 달리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간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다시 밖으로 나오자 말 두 마리가 이끄는 마차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대성당 앞에 있으니 마치 저 마차를 타고 돌길을 달려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혼자라는 신분이 충동을 억제해 준다.
이번엔 옛 건물과 길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쇼넨펠스가세'로 갔다. 곳곳이 공사 중이고 지나온 길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모차르트 하우스를 발견했지만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결국 돌고 돌아서 다시 성당 앞으로 왔다.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성당은 어디를 가도 결국엔 다시 만나게 된다. 작고 조그마한 마을지리에 익숙해진 순간이다.
한낮의 더위는 갈증을 쉽게 일으켰다. 물을 마시는 것이 가장 좋지만 눈앞에 있는 아이스크림가게에 시선이 머물렀다. 젤라또는 놓칠 수 없지!
그런데 잠깐, 뭐라고 쓰여있는 거지? 까막눈이 되어서 꼬부랑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잠시 고민하다가 소심하게 말했다.
"분홍색과 노란색으로 주세요."
내 말을 들은 직원이 씨익 웃어 보이며 아이스크림을 퍼줬다. 주섬주섬 동전을 꺼내서 계산을 마친 뒤 받아 든 젤라또의 맛은 꿀맛이었다. 하지만 더위에 지친 아이스크림은 금방 녹아내리고 말았다.
후... 점점 물로 변해가는 아이스크림을 한 방울이라도 놓칠세라 먹어 치우면서도 '이제 어디로 가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한여름의 축제
Film Festival
덤으로 얻은 하루지만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던 나는 오전에 함께 여행했던 친구가 추천해 준 '시청사 앞 광장'에 가보기로 했다.
지하철 역에서 올라오니 바로 앞에 철길이 놓여 있고 사람들이 드램을 타기 위해 줄을 서있었다. 정면에는 그 친구가 설명해 준 교회가 보였다. 짧은 인연이었지만 나는 아직도 함께 여행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빈 대학을 지나서 가로수길을 계속해서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낮아진 해는 건물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한결 선선해진 날씨는 걷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여름이지만 바람의 찬공기를 맞으며 거리에 떨어진 커다란 낙엽을 보니 나 홀로 가을을 맞이한 기분이 들었다.
초록이 우거진 공원, 노천카페, 분수대... 보이는 풍경 하나하나가 서정적이다. 왜 이곳을 강력추천해 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의 진심이 나의 여행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흥겨운 음악소리를 따라서 가보았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는 시청 앞 광장에서는 영화축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대형 스크린이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에서 밤새 영화를 틀어줄 모양이다.
무엇보다 사람들 손에 들려있는 시원한 맥주잔에 눈길이 갔다. 해 질 무렵 하루를 끝내려는 나에게 수고했다고 주는 맥주 한잔의 기쁨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계속 주위를 서성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찬 곳에는 빈 테이블이 없었고 설령 한 자리가 비어 있다 할지라도 틈을 비집고 앉을 자신이 없었다. 휴... 행복에 겨워 대낮부터 마셔댔던 맥주 한 잔이 생각났다.
그래, 이미 오늘 한 잔 했으니 그걸로 된 거지...
아쉬운 발걸음을 겨우 떼서 스크린 앞으로 걸어갔다. 놀라운 것은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미리 좋은 자리를 맡으려고 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단 것이다. 사람들은 아직도 공원에서 흥겨운 시간을 즐기고 있는 중이다.
아직 입장이 안 되는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내가 벌써 가장 앞자리에 앉아 있지 않은가!
너무나도 한가로워 보이는 경호원 몇 분들과 기념사진을 남기려는 몇 안 되는 관광객들과 느긋하게 텅 빈 스크린을 즐기고 있는 중이다.
이토록 여유로운 축제 분위기라니!
정식 입장시간이 되지 않은 건지 지금 상황에 대한 궁금증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유럽의 어둠은 아주 깊은 밤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어디로 꽁꽁 숨어버렸는지 알 수 없는 태양은 아직까지 퇴근하지 않고 있었다.
'기왕 앉은 거 기다렸다가 첫 장면만 조금 보다가 갈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할 텐데... 영화일 뿐인데 그냥 영상만 봐도 되지. 그런데 대체 언제 시작하는 걸까?'
쉽게 얻지 못할 기회에 고민이 됐다. 하지만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돌아다닌 탓에 눈꺼풀이 천근만근이고, 몸이 피곤하다고 신호를 보내왔다.
이제 막 5시가 넘은 시간이라 언제 시작할지 모를 영화를 기다리는 것은 무리였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자리를 떠나기로 했다.
그들의 축제는 이제부터 시작되겠지만 이미 신나게 즐긴 나만의 한여름 축제는 여기서 끝이 났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소나기가 한바탕 쏟아졌다. 벌써 끝나버린 축제에 속상해하는 마음을 달래주려는지 시원하게도 내린다.
저녁거리를 사들고 숙소로 향하는 마음은 더 이상 아쉽지도 무겁지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