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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ound of tourists

계획보다 중요한 건 본능

by JULIE K

지난밤 새로 온 한국인 룸메이트와 아침식사를 했다. 방학에 휴가철이 겹쳐서인지 여행을 떠나온 이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이미 오스트리아여행을 마치고 빈에서 마지막 일정이 남았다고 했다. 나와 정 반대의 루트였기에 서로의 여행 경험을 주고받으며 우리의 수다는 자연스레 이어졌다.


늘 그렇듯 부산스러운 아침을 보내고 또 다른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은 빈을 떠나서 잘츠부르크로 이동할 예정이다.



일산 꽃 박람회,
미라벨 정원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여태껏 여행을 다니면서 경험해 보지 못한 극성수기의 혼잡함이 혼을 쏙 빼놓았다. 만석인 기차 안은 여행을 떠나는 람들의 설렘지수로 시끌벅적했다. 수학여행 때 이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약 3시간을 달려서 '잘츠부르크(Salzburg)'에 도착했다. 시골의 특유한 맑은 공기가 가장 먼저 반긴다.


휴~~ 이제 좀 조용하니 살 것 같았다. 숙소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하려는데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이 직원 교육에 한창이었다.


열과 성을 다해서 얘기하는 것을 잠자코 기다릴 수만은 없어 존재감을 드러내며 슬쩍 도착을 알렸더니 체크인은 12시부터 라며 짐은 아래층에 가져다 놓으면 된다고 했다.


이번 유스호스텔은 상당히 자유분방한 분위기였다. 오케이~ 일단 상황을 접수한 뒤 짐을 놓고 밖으로 나왔다. 어찌 됐든 무거운 캐리어로부터 해방된 나는 기분이 좋다.


지나가며 발견한 가게에서 초콜릿과자를 샀는데 날이 더워서인지 반쯤 녹아있었다. 맛이나 보자 하며 주섬주섬 꺼내 먹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미라벨정원이 짠~ 하고 눈앞에 나타났다.


여기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촬영한 곳이란 말이지?


저 멀리 '호엔잘츠부르크성(Festung Hohensalzburg)'이 보였다. 본격적인 정원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붉은색 꽃들이 수놓은 모습은 입구에서부터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Doe- a deer, a female deer
Ray- a drop of golden sun


노랫말이 자연스레 흥얼거려진다. 열심히 사진을 찍고 이제 막 정원투어를 시작하려는 찰나, 어디선가 한국에서 온 단체관광객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규모가 꽤나 커 보이는 여행사여서 인지 인원수도 상당했다. 한껏 들뜬 사람들 틈에서 자연스레 어우러지며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비슷한 속도로 이동하다 보니 어느 순간 현타가 왔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와 7명의 아이들은 사라지고 일산 꽃박람회에 온 듯한 강한 인상만 남아 있었다. 정원 곳곳에 있는 조각상들이며 형형색색의 꽃들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 모습에 설레던 마음도 사라져 버렸다.


정원을 가로질러 이곳을 빠져나간 뒤에도 이동 동선이 이들과 겹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오늘 아침 룸메이트가 알려 준 '장크트길겐(St Gilgen)'이 퍼뜩 올랐다.


더불어 작년 영국여행에서도 길 가다가 우연히 만났던 사람이 추천해 준 브리스톨로 깜짝 여행을 다녀왔던 것이 각났다.


이제 보니 나는 즉흥여행을 좋아했던가?


유럽의 여름은 하루가 길다. 잠시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충동은 눈 깜짝할 새 나를 버스터미널 앞에 세워 놨다.



본능에 따라,
St Gilgen


복잡한 곳을 빠져나오니 여유가 생겼다. 한낮의 햇살이 이제야 느껴진다. 가까운 매표소에서 무작정 티켓을 끊고 필요한 지도를 얻었다. 버스 출발까지 시간이 남아서 근처에서 간단한 빵으로 배를 채워본다.


인생은 그냥 Go~~ 여행도 무조건 GO!!


이제 출발하기만 하면 된다. 어떤 곳인지, 그곳에서 뭘 봐야 하는지, 어떻게 다녀야 하는지 여행에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정보와 계획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의 답답함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이 선이다. 서서히 들어오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살면서 충동적으로 어디론가 떠나본 적이 있는가? 목적지 하나만 보고 떠나는 지금 난 그 어느 때보다 설렌다.


나의 일탈을 환영하기라도 하듯 창밖에는 저 푸른 초원 위에 동화 같은 집들이 있는 환상적인 절경이 펼쳐졌다. 한동안 넋을 잃고 창밖만 바라보다 보니 영롱한 옥빛의 '볼프강 호수(Wolfgangsee)' 나타났다.


우와~~~~!!!


이곳은 지상낙원인가? 한 폭의 그림 같은 자연은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놀란 토끼눈으로 호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명하고 아름다운 메랄드를 물에 풀어놓은 것만 같았다.


대충 보니 '장크트길겐 반호프'에서 내리면 될 것 같아서 무작정 버스에서 하차했다.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노란색 케이블카였다. 케이블카를 타고 저쪽 산 정상으로 오르면 푸르름을 한껏 머금은 호수와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 높은 곳까지 둘러볼 시간은 없기에 호수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눈에 띈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놀이터였다.


'놀이터가 이곳에 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아이들이 해맑게 뛰어놀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에 있는 폐타이어가 깔린 놀이터가 아닌, 자연과 함께 어러지는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들의 천사 같은 얼굴에선 빛이 났다.


누군가에겐 선망인 것이 다른 누군가에겐 현실이 된다.


놀이터를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볼프강을 만날 수 있었다. 호수 한가운데서 사람들이 수영하며 한여름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의 여름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잠시 벤치에 앉아서 말없이 호수를 바라봤다.


잔잔한 물결이 평화롭구나... 그런데 여긴 나이 들어서 오면 정말 좋을 것 같아. 경치를 바라보며 볼프강을 감상하는 것도 잠시, 그새를 못 참고 좀이 쑤신 나는 다시 발길 닿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호수가 전부는 아닐 테니 마을 쪽을 한 번 둘러보자 하고 발걸음을 떼기가 무섭게 무언가가 다시 내 발목을 잡아끌었다.


여긴 뭐지?


집과 호수, 파란 하늘 그리고 요트...


내가 걷던 길의 끝에서는 비현실 적인 또 다른 세상이 나타났다. 가던 길을 멈추고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빨려 들어갈 기세로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강아지들과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부부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등바등 살아오면서 늘 꿈꾸던 이상적인 삶을 누군가는 이미 실현하고 있었다.


그들의 여유로운 오후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주책맞게 감성적으로 변하기 전에 발걸음을 돌려서 본격적으로 마을 탐방에 나섰다. 버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조금만 둘러보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쁘다.


마을이, 집들이 정말 예뻤다.


시간을 계속 확인하면서도 동화 같은 집들에 반해서 나도 모르게 점점 마을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25분밖에 안 남았는데 되돌아갈 수는 있을지... 머리는 그만 가자하는데 대책 없이 심장은 자꾸만 마을 깊숙한 곳으로 몸뚱이를 밀어 넣는다.


불안한 마음에 발걸음은 빨라지면서도 눈치 없는 손가락은 자꾸만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시간만 더 머물다 갈까? 하는 갈등도 생겼다.


여기로구나~~~!!


세모나게 뾰족한 지붕과 창문아래 피어난 화사한 꽃들이 인상적인 건물을 본 순간 조급해하던 발걸음을 잠시 멈췄다. 바로 앞에는 어린 모차르트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바이올린을 켜는 역동적인 모습에서 모차르트와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존경심이 느껴졌다.


바로 이걸 보여주려고 앙증맞은 집들이 나의 발길을 붙잡았던 것이었다. 시간에 쫓겨서 모차르트 외가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아쉬움이 눈 녹듯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작은 광장 앞에 서서 벅차오르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하나라도 놓칠세라 눈에 보이는 정경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그래, 이거면 됐지!


마지막 장소가 꽤나 흡족했던 나는 이제야 돌아갈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 분명 시간이 걸릴 것이다. 여기서 바로 갈 수 있는 최단 거리를 찾아야만 한다.


주위를 살펴보던 바로 그때, 뒤를 돌자 저 위에 큰길이 눈에 띄었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것으로 보아 저곳으로 올라가면 분명 버스정류장이 있을 것이다.


이제 남은 시간은 단 10분.


거의 뛰다시피 해서 언덕을 힘겹게 올라갔다. 큰 길가로 나오자마자 본능적으로 왼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내가 왔던 방향을 확신하며 열심히 뛰어간 곳엔 처음에 봤던 케이블카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유유히 정상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바로 그곳에는 버스정류장이 있었다.


그렇게 단 4분 만을 남긴 채 적지에 도착한 나는 무사히 이곳을 탈출할 수 있었다. 이제 잘츠부르크로 돌아가면 못다 한 여정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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