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를 옮길 결심
할슈타트를 출발한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배는 호수 건너편에 정박했다. 사람들을 따라서 좁은 언덕길을 조심스레 올라가 본다. 바람에 한들거리는 우거진 풀숲에서 여름향기가 났다.
첩첩산중으로 둘러싸인 아주 작은 공간에는 앙증맞은 할슈타트 역사가 세워져 있었다. 정감 가는 시골 분위기에 모처럼 마음이 따뜻해져 왔다.
홀로 외로이 나있는 철로를 따라 아담하고 귀여운 기차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역사가 오래된 열차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뜬금없지만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세상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기차 내부는 낡고 에어컨이 없었다. 이미 예상한 결과였기에 개의치 않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자연바람에 의지하며 더위를 식혔다.
기차는 들판을 지나고 터널을 가르며 부지런히 달려갔다. 지나치는 장소에 따라 바깥공기도 달라졌다. 언젠가 기차를 타고 시골에 갈 때였나... 어린 시절 맡았던 냄새가 80년대로 돌아간 듯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기분 따라가는 여행
한동안 추억여행에 빠져 있던 것도 잠시 열차는 눈 깜짝할 새 '바트이슐(Bad Ischl)'에 도착했다. 버스로 갈아타기 위해 역 밖으로 나왔는데, 사람은 없고 뜨거운 태양의 조명만 잔뜩 받고 있는 텅 빈 마을이 꼭 영화 세트장처럼 보였다.
정갈하고 반듯반듯한 건물들이 모형처럼 줄지어있었다. 잘츠부르크로 돌아가야 하는 일정은 잠시 넣어두기로 하고 요상하고 신비로운 마을에 이끌려 눈에 보이는 모습들을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쓰레기 한 점 없는 깨끗한 거리가 반질반질 광이 난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마을 중심으로 갈 수 있는 거지?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이 없어서 난감해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쏟아지는 햇빛의 후광을 받으며 슬로 모션으로 걸어오고 있는 한 청년이 눈에 띄었다.
금발 머리에 하얀색 니트를 입고 있는 모습에서 광채가 났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잘생긴 청년을 붙잡고 무작정 말을 걸었다. 이 사람을 지나치면 다른 누군가를 또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실례합니다. 다운타운으로 가려고 하는데 어느 쪽으로 가야 할까요?"
"아, 이쪽으로 쭉 걸어가시면 돼요. 은행이 나오면 그곳이 다운타운이에요."
청년은 햇살처럼 화사한 미소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짧은 대화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계획에 없던 낯선 곳을 걷는 기분이 즐겁다. 여행 내내 독일어 지옥에 갇혀서 갑갑했는데 목적 없는 유랑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도 독어, 저기도 독어, 온 세상이 독일어 천국이지만 더 이상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지금 내 눈엔 그저 하나의 문양으로 보일 뿐이었다.
한결 홀가분 해진 나는 이 마을을 전세 낸 것처럼 뽈뽈거리며 거리를 활보했다. 눈에 보이는 건물이 어떤 곳인지, 주택은 어디에 있는지 그 어떠한 것도 중요치 않다.
그냥 도시 자체가 하나의 세트장처럼 보일 뿐이니까...
그렇게 한참을 신나게 걷다가 새하얀 외벽 위에 가늘고 뾰족한 첨탑이 있는 독특한 건물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창문 모양도 제각각이고 직선과 곡선을 넘나들며 개성이 넘치지만 어색하지 않은 건물이 신기해서 넋을 잃고 바라봤다.
저기는 교회일까?
처음으로 건물의 용도가 궁금해졌는데 알 길이 없었다.
한 가지 반가운 소식은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이 한 두 명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마을 중심부에 들어온 것이 분명하다.
테라스가 있는 레스토랑도 있고 멋진 건물의 관광안내소도 보였다. 조금 더 걸어 들어가니 아까 버스에서 봤던 풍경이 나타났다. 작고 매력적인 마을에 풍덩 빠진 것도 잠시 배고픔이 보내는 다급한 신호에 가까운 식당으로 들어갔다.
간단한 메뉴를 주문하고 한가로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늦은 끼니를 때우면서 딱 한 시간만 있다가 가자 한 것이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숙소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시끄럽고 어수선했던 방 분위기와 아침에 본 장면들이 계속 떠올랐다.
쉬고 싶다. 쉬고 싶다. 정말로... 쉬고 싶다.
머릿속은 온통 편히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최대한 밍기적거리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간이 되었을 때 다시 역으로 향했다.
잘츠부르크에 도착했는데도 나의 방황은 계속되었다. 차마 숙소로 들어가지 못하고 동네를 어기적거리며 걷던 중 불현듯 지나쳤던 호텔이 생각났다.
일본의 체인 호텔로 객실은 좁지만 가성비가 좋고 깨끗하게 관리를 잘하기로 유명하다. 나도 모르게 빨라진 발걸음은 순식간에 호텔 앞으로 이동시켰다.
'현장에서 결제하면 할인혜택도 못 받고 비쌀 텐데...'
지금껏 여행을 와서 숙소를 옮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항상 미리 예약을 마치고 오기 때문에 더욱이 그럴 일이 없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에 도착하자마다 시작된 강행군에 지칠 대로 지쳐버려서 절대적인 휴식이 간절했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용기를 내어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나의 첫 반란이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방이 있는지 물어봤다.
"마침 객실이 비어 있네요... 1박에 139유로입니다."
직원이 말한 금액이 귓가에 들리지 않았다. 오직 씻고 싶다는 집념이 숫자 따위는 과감하게 자체 필터링을 시켜버린 것이다.
혹시라도 비싸면 바로 나와야지 했던 다짐은 사라지고 무엇에 홀렸는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서 결제를 하고 있었다.
'여행 와서 신용카드를 긁다니! 나 이래도 되는 거야? 예산에 없던 거잖아. 안될게 뭐 있어? 거기 다시 가서 자겠다고? 그래도... 오늘만 버티면 되는데...'
내 안의 수많은 자아들이 쑥덕거린다. 마지막으로 본 공용사워장과 도미토리 객실의 분위기가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결국 나의 정신은 지름신에게 굴복당하고 말았다. 카드키를 받아 들고 밖으로 나온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폈다.
해방이다!!
걸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걸음으로 호스텔로 향했다. 이미 패킹되어 있는 짐가방을 쏙 빼들고 당당하게 체크아웃을 마쳤다.
가는 길에 내가 좋아하는 서브웨이에 들러서 치킨데리야끼 샌드위치를 야무지게 포장했다. 이래도 되나 싶었던 자신감 없는 의문들은 사라지고 원하는 것을 다 얻는 지금 누구보다 신이 나있다.
아무도 없는 깨끗한 호텔방에 들어서자 모든 긴장이 풀려버렸다. 난생처음으로 일탈에 성공한 기쁨에 도취되어 뭐라도 된 것 마냥 우쭐댔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빵빵 터지는 와이파이로 인터넷도 실컷 하면서 1분 1초가 소중한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한 그날의 밤은 자유 그 자체였다.
카드청구서가 영원히 날아오지 않을 것처럼 오늘만 사는 것! 한 번이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