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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마을

Innsbruck

by JULIE K

항상 그렇듯이 급한 건 없지만 조식을 먹기 위해 일찌감치 방을 나섰다. 간의 부지런함을 동반한다면 충분히 여유 있게 아침 식사를 즐길 수 있다.


갓 구워 나온 빵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여행 와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아침을 먹는다는 생각에 행동이 빨라졌다.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을 접시에 푸짐하게 담았다. 혼자라서 어색해하던 여행 새내기는 어느새 쑥쑥 자라서 오롯이 음식에만 집중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무심하게 먼 길을,
Innsbruck


어디로 떠날지 목적지가 정해지면 의식적으로 여행책 한 권을 사서 정독한다. 처음 접하는 나라에 관한 기본적인 자료부터 간단한 인사말, 화폐단위, 몰랐던 소도시까지 알짜베기 정보들이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고 싶은 지역들을 표시해 두었다가 지도에서 동선을 살핀다. 대략적인 이동 시간을 계산하고 각 지역마다 세부 일정을 정하면 기본적인 준비는 어느 정도 마치게 된다.


이제 남은 일은 숙소와 지역마다 이동수단을 미리 예약하는 것이다. 모든 예약을 마치면 마지막으로 식당, 박물관, 쇼핑 등 지출이 발생할 곳들을 찾아서 예산을 측정한다.


구글에서 최종적으로 이동경로를 미리 탐색하고 나면 직 떠나지 않았는데 벌써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든다.


빈에서 '인-아웃' 일정이었기에 가까운 근교만 한 두 군데 다녀오자 했었다. 그러던 중 여행책에 던 사진 한 장이 눈길을 끌었다.


사람 얼굴 모양의 거대한 녹색 동산에서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인공폭포, 여긴 어떤 곳일까? 단순한 궁금증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Swarovski Crystal Worlds


사실 크리스털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나의 흥미를 끈 것은 오직 신비로운 분위기의 거인폭포뿐이었다. 왠지 저곳에 가면 평범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았다.


사진만 보고 섣불리 판단하며 무심결에 마지막 하루를 '인스브루크(Innsbruck)'에 내어주다. 그렇게 해서 나는 빈에서부터 약 5시간이나 걸리는 생소한 마을에 홀로 덩그러니 떨어게 된 것이다.



기차역에서 가장 가까운 호텔을 예약한 것은 정말 칭찬할만했다. 무게와 부피가 늘어난 캐리어를 끌고 시내까지 가는 것은 여러모로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이른 시간에 도착한 탓에 방 구경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체크인을 도와주시던 분이 마침 준비된 방이 있다면서 바로 객실로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메마른 사막에 단비가 내듯 잠시라도 쉬어갈 수 있단 생각에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런 내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던 직원이 팸플릿을 보여주며 말했다.


"혹시 크리스털 월드에 가시나요? 전망대랑 이 이용할 수 있는 카드가 있어요. 특별 할인가로 31유로 밖에 안 해요."


저렴하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하지만 모험심이 투철하지 않았기에 혼자서 전망대에 올라갈 생각은 전혀 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괜찮다며 정중히 사양한 뒤 나의 마지막 안식처가 되어 줄 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자 쾌적하고 넓은 공간이 나왔다. 창밖으로 알록달록 건물들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보였고 그 뒤로 알프스 산맥이 보였다.


아침이라 그런지 조명을 켜지 않아도 내부는 환했다. 당장이라도 침대로 뛰어들어 숨 자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지금까지 달려온 고된 일정들로 피로가 잔뜩 축적돼서 쉬고 싶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아쉽기도 했다.


마지막 여행지가 주는 기운은 참으로 복잡 미묘하다.


셔틀버스 시간이 다가오자 아늑하고 폭신한 침대의 유혹을 겨우겨우 뿌리치고 메라를 챙겨서 방을 나서본다.



반짝이는 백조,
Swarovski Crystal Worlds


호텔 바로 앞에서 셔틀버스를 타면 '크리스털 월드(Swarovski Crystal Worlds)'로 갈 수 있다. 버스정류장 안내판에도 광고물이 부착되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유명한 액세서리 브랜드 스와로브스키의 본 고장인 오스트리아에 가는 전시회장이라 떠나는 마음가짐부터 달랐다.


창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알프스 산맥과 봉우리 끝에 걸쳐있는 하얀 뭉게구름 마저 거대한 보석으로 보였으니 말이다.


오묘한 회색빛이 도는 산맥이 끝없이 펼쳐진 인스브루크의 첫인상은 지금까지 봐왔던 다른 도시들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피로에 찌든 여독이 어여쁜 창밖 풍경에 눈 녹듯 사라져 버리고 날씨마저 도와주는 여행의 마지막이 흥겹다.


YES TO ALL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곳에는 대규모 연구단지를 뒤로한 커다란 사인이 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 옆에는 석유 파동으로 한 때 어려움을 겪던 스와로브스키가 인스브루크 동계올림픽 때 크리스털 마우스를 기념품으로 제작해서 새로운 도약을 맞이했다는, 영광의 생쥐 조형물이 귀여운 얼굴을 하며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자~~ 그럼 이제 티켓을 끊으러 가볼까? 매표를 하고 가장 먼저 사람 얼굴을 보러 달려갔다.


숲 속 한가운데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있을 것 같던 장엄한 동산은 나의 상상 속에서 빠져나와 활짝 열린 공간에서 작고 아담한 모습으로 랜드마크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아주 높은 곳에서 대량의 물을 세차게 쏟아낼 것 같던 폭포 역시 소박한 물줄기를 시원하게 내뿜고 있었다.


요 장면 하나 보기 위해 먼 길 달려왔다고 생각하니 다소 힘이 빠졌다. 허탈함을 감추지 못하며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여성이 다가와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그래도 사진은 남겨야지...'


같이 온 일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내게 부탁하는 것이 이상했지만 어찌 됐든 덕분에 나도 거인 폭포와 기념사진을 남 수 있었다.



반짝이는 우아한 백조를 지나 안으로 들어간 곳에는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상이 있었다. 어두컴컴한 공간을 반짝이는 보석들이 다양한 형상으로 불을 밝히고 있었다.


또 다른 공간에서는 마네킹 다리가 움직이고 옷들이 공중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신기하다기 보단 난해했다. 기괴하고 음산한 분위기의 전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랐다.


이번엔 수많은 거울 조각들로 이루어진 크리스털 돔 안으로 들어가 봤다. 조명색이 바뀌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다시 밖으로 나와서 길을 따라서 전시를 관람했다.


눈 결정체가 보이는 듯 한 겨울나무와 빨간색 하이힐을 신은 얼룩말, 다양한 형태의 크리스털 인형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빛나는 보석으로 표현할 수 있는 예술의 세계는 무궁무진하게 피어났다.


"또 만났네요?"


"아, 어두워서 몰라봤어요."


계속해서 이어지는 작품들을 구경하는데 아까 서로 사진을 찍어줬던 영국인 여자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배낭여행 중이라는 그녀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과학선생님이라고 했다. 반가움에 통성명을 나눈 우린 어둠 속에서 서로의 사진을 최대한 흔들리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여서 찍어주기 시작했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걷고 있는 남자와 냉랭한 기류가 아닌 편안함이 느껴지는 것이 둘은 남매가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우리 셋은 가깝지 않지만 어색하지 않은 거리를 유지하며 같은 공간을 거닐기 시작했다. 필요에 의하면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각자의 전시관람을 존중해 주면서...


다양한 테마의 작품들을 끝까지 다 관람하고 나서야 밝은 세상을 만날 수 있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보석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알알이 박혀있는 천장 아래에는 당장이라도 데려가고 싶은 영롱한 스와로브스키 보석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어쩜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지 넋 놓고 감상하기 바빴지만 선뜻 지갑이 열리지는 않았다.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보다 눈에 담는 것이 더 좋았다.


기념품숍까지 알차게 즐긴 뒤 밖으로 나왔다. 지루해할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가 있었다. 꼬마친구들을 배려하는 공간이 가장 마음에 든다.


오솔길을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그 흔한 카페나 추로스 가게조차 보이지 않았다. 넓은 대지를 상용을 목적으로 꾸미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최대한 유지하고 있는 것이 놀라웠다.


그래서일까? 길가에 핀 '자수정' 빛깔의 고운 꽃들과 졸졸졸 흐르는 '아쿠아 마린' 물방울이 모인 시냇물이 크리스털보다 더 예뻐 보였다.


저 멀리 보이는 '사파이어' 하늘 아래 '블랙 다이아몬드' 알프스 산맥과 여전히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화이트 토파즈' 구름이 빛나보였다.


어쩌면 계절 따라 변하며 다채로운 매력으로 우리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자연'이야말로 영원히 빛을 잃지 않는 진정한 보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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