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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보석은 여기 있었네!

Top of Innsbruck

by JULIE K

유명하다는 황금지붕이 눈앞에 있다. 사람들이 그 앞을 에워싸며 구경하고 있었다.


흠...


황금을 알아보는 눈이 없어서인지 오늘 있을 공연 준비로 주위가 부산스러워서 인지... 내 눈엔 그냥 금빛 페인트를 두른 지붕에 지나지 않았다. 기대보다 컸던 실망을 안고 시내 곳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소도시의 다운타운은 관광객들로 빼곡히 차 있었다. 뭔가 조용하고 차분할 거란 생각과 달리 핫플레이스와 흡사한 활발한 분위기에 갈증을 느꼈다.


"크리스털 월드와 전망대 두 곳을 오직 31유로에 이용할 수 있어요!"


불현듯 호텔 매니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신이 있다면 이렇게 속삭였을까? 그의 목소리가 한참을 귓가에 맴돌았다.


그래! 이곳을 벗어나자!



딸기 한 팩의 여유


두 번 다시 여기에 또 올 일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자 철부지 아줌마는 대자연의 깊숙한 곳까지 올라갈 것을 결심했다.


판단이 서면 바로 행동하는 편이라 사람들 틈에서 벗어나 다짜고짜 '인 강(Inn River)' 쪽으로 빠져나왔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서둘러야 한다. 그런데... 배가 고프다. 간단한 요깃거리를 찾기 위해 눈에 띄는 동네 슈퍼로 거침없이 돌진했다.


정오가 훌쩍 넘은 시간이라 햇살이 더욱 뜨겁게 내리쬐고 있는 인 강변에 우두커니 서있는 내 두 손에는 시원한 생수 한 병과 딸기 한 팩이 들려있었다.


1분 전의 정신없던 나는 상큼한 무언가가 먹고 싶었나 보다. 강변을 따라서 걸으며 딸기 한 알을 우걱우걱 씹어댔다.


'아차, 그런데 이거 안 씻었잖아?'


깨달음은 항상 뒤늦게 찾아온다.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아무렇지 않게 딸기 한 팩을 흡입했다. 위생보다 배고픔을 달래는 것이 먼저였다. 배가 어느 정도 차며 안정을 되찾았다.


아무도 없는 강변의 산책길에서 이글거리는 태양을 벗 삼아 끼니를 때우고 지도를 따라서 느긋하게 걸어 본다...?!!

산 위로 올라가려면 서둘러야 하는데 어쩐 일인지 여유가 넘친다. 래도 되는 건가?


내가 걷고 있는 길은 다행히 나무들이 우거져 있어서 직사광선을 피할 수 있었다. 대신 푸릇푸릇한 녹색의 향연을 제외하면 크게 구경할 건 없었다.


자연스레 시선은 강 건너 알프스 산맥을 두르고 있는 알록달록한 집들로 향했다. 정갈한 마을이 꼭 만화 배경 같아 보였다. 강 건너로 이어진 다리를 만났다.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듯 나도 모르게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시원한 나무그늘을 벗어나자마자 바로 작열하는 태양의 기운이 피부에 닿았다. 따가운 햇살을 대수롭지 않게 가르며 벌게진 얼굴에도 신난다고 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어댔다.


이것도 다 추억이지... 하며 강 건너 마을을 살피기 시작했다. 멀리서 볼 땐 완벽한 그림이었던 마을의 벽에 락카로 쓴 듯한 글씨들을 발견한 순간 나의 상상은 어둠 속으로 빠져버렸다.


인적이 드문 마을의 분위기가 스산하게 느껴진 것은 단순히 벽에 그려진 그라피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혼자 하는 여행의 철칙 중 하나.


낯선 곳에 다닐 때는 항상 경계를 늦추지 말 것!


딸기 한 팩의 에너지로 흥에 겨워 딴 길로 샌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샛길에서 빠져나와 다시 전망대로 가기 위해 방향을 다잡았다.



높은 곳에 올라,
Nordkette


'대체 어디로 가야 전망대로 올라갈 수 있는 거야?'


아무리 걸어도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고 케이블카의 '케'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녹아내릴 것만 같은 강렬한 오후의 햇살에 지칠 대로 지쳐가고 있었다.


공원을 빠져나온 뒤 보이는 건물들은 삭막해 보였다. 관광지 다운 모습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고, 관광지 답지 않게 지나가는 사람 한 명 없었다.


한참을 헤매다가 그만 포기하고 돌아서는데 지도에 있는 그림과 똑같은 조형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설마... 저기?'


생김새로 보아하니 맞게 찾아온 것이 틀림다. 마지막으로 가보기나 하자 하고 성큼성큼 가까이 다가가 본다.


하... 나의 예상을 뒤엎고 최종 목적지는 지하로 내려가야 했다. 이러니 찾을 수가 없지! 허탈한 웃음이 절로 났다. 벙커처럼 꼭꼭 숨겨놓은 매표소는 사막에서 바늘 찾기가 따로 없었다.


한숨 고르고 지하로 내려갔다. 매표소에서 티켓 가격을 물으니 정상까지 27유로라고 했다.


호텔에서 안내해 줬던 시티카드가 생각났다. 이래서 다들 인스브루크 카드를 구입하는구나! 계획에 없던 충동적인 선택이었기에 눈물을 머금고 달달 떨리는 손으로 티켓을 구매했다.

기재된 금액은 약 10여 년 전의 가격으로 현재와 차이가 있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분명 지상에서는 볼 수 없었던 사람들과 이제 막 들어오는 꼬마 열차에 탑승했다.


첫 번째 전망대로 가는 길이 재밌다.


지하를 뚫고 달리던 푸니쿨라는 잠시 지상으로 올라가서 조금 전 강변을 산책하다가 봤던 다리를 건너고 다시 지하를 달리기 시작했다.


한 두 정거장 지나자 이번엔 경사진 곳을 올라갔다. 산을 타고 있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푸니쿨라는 롤러코스터처럼 마을의 지하 곳곳을 누비다가 첫 번째 전망대인 'Hungerburg'로 안내했다.


몽실몽실 피어난 새하얀 구름이 먼저 반겨주었다. 하늘만 바라봐도 속이 시원해졌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인스브루크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드넓게 펼쳐졌다.


탁 트인 경치가 일품이다.


숨을 깊게 쉬어본다. 가슴속까지 파고드는 맑은 공기가 몸을 가볍게 해 준다. 기분이 한결 좋아진 나는 바로 이어서 타야 하는 케이블카를 먼저 보내고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전망 좋은 곳에 자리한 레스토랑이 눈에 들어왔다. 테라스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 밖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모든 것이 평화롭다.


시간에 맞춰 다음 전망대로 올라가는 케이블카에 탑승했다.


케이블카라니! 그것도 머나먼 타국에서 나 혼자?


평생 있을 수 없던 일이 벌어졌다. 케이블카가 상공을 가로질러 산 위로 올라가는 내내 심장이 쿵쾅거렸다. 소심한 탓에 혼자 대범하게 물건하나 사 본 적이 없던 나는 여행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평소라면 절대 못 할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경험하는 중이다.


드디어 두 번째 전망대인 'Seegrube'에 도착했다.


겁도 없이 아줌마 혼자 알프스 산맥 위에 올라왔다. 지상 최고의 액티비티들이 많지만 이 보다 짜릿한 것이 있을까?


누군가 남기고 간 맥주잔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아찔한 풍경을 바로 앞에서 바라보며 마시는 맥주... 상상만 해도 청량함이 느껴진다. 시간만 있었더라면 분명 저 자리에 앉아서 한 잔 하고 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걷기 시작했다.


풍경이 가히 예술이다.


하늘과 맞닿은 곳에서 손만 뻗으면 구름이 잡힐 것만 같았다. 더 높이 올라온 만큼 마을은 더 작아졌다.


뒤를 돌자 하루 종일 여행하며 봐왔던 알프스 산맥의 봉우리가 코앞에 있었다. 빙하와 눈 덮인 익숙한 모습이 아닌 잿빛 돌산의 거친 산새가 웅장하다.


먼 곳에서부터 시선을 가까이 두니 더 많은 것들이 보였다.


의자에 앉아서 경치를 감상하는 사람들, 트래킹 하는 사람들, 그네를 타는 아이들, 울타리 너머에서 쉬고 있는 소들... 가만있자, 소라고? 해발 1900m에서 소라니? 그러고 보니 이 높은 곳에서 그네를 탄다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만 어색해 보이지는 않았다.


믿을 수 없는 풍경에 연신 놀라며 마지막 정상으로 올라가려는데 케이블카가 이미 떠나고 있었다.


지금 시각은 오후 4시가 넘었고 다음 출발은 4시 30분. 5시가 마지막이라는데 올라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정상까지 가고 싶었지만 시간은 촉박하고 혼자 있으니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내려가는 케이블카에 사람들이 탑승하기 시작했다. 잠시 주춤거리다가 나도 모르게 올라탔다.


'에라 모르겠다. 엄한 데서 고립되는 것보다 낫겠지...'


열심히 왔던 길을 되짚어서 지상으로 내려오니 5시. 그 케이블카에 뛰어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고 길었던 하루의 끝은 베트남 음식으로 달래려고 봐두었던 식당으로 한 걸음에 달려갔으나 CLOSED!!

그러고 보니 영업이 끝난 상점들이 많이 보였다.


후... 역시 끝까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지만 마음을 비우면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포기하지 않고 거리를 걸으며 여행의 마지막을 즐겨본다. 아직 관광객들을 위한 행위예술가들은 퇴근하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마침 근처에 문을 연 곳이 있어 내가 좋아하는 케밥을 포장해서 나오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8시에 황금지붕 앞에서 하는 공연은 식간에 물 건너갔다.


대신 호텔에서 올림픽 하이라이트를 시청하며 케밥을 먹기로 했다.


비가 오니 포기가 쉬웠다. 신한 소파에 앉아 TV를 보며 혼자 보내는 시간이 더없이 안락했다. 다신 오지 않을 이 순간을 낌없이 잘 보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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