苦盡甘來
아침부터 괜스레 히죽히죽거린다. 창밖으로 보이는 적당히 흐린 하늘에서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만 봐도 기분이 좋다.
창문을 톡톡 두드리며 이만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다시 빈으로 가서 단숨에 공항까지 가야 하는 긴 여정을 앞둔 지금, 한바탕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님이 그저 반갑기만 하다.
고생 끝에 돌아오는 건...
빨간색 열차가 매끄럽게 기차역을 빠져나간다. 날씨 탓인지 기차 안의 분위기는 한결 차분했다.
산안개에 갇힌 알프스 산맥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더 이상 바깥풍경에 정신 팔릴 일이 없자 들고 온 책을 주섬주섬 꺼내 본다.
덜컹거리는 기차소리를 벗 삼아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책 속의 세상은 여러 감정들이 얽힌 채 복잡 미묘하게 흘러간다. 그들의 생각을 엿보는 것이 흥미롭다.
한참을 집중하다 보니 배가 고파졌다. 미리 준비해 온 과자를 꺼냈다. 초콜릿을 듬뿍 묻힌 과자를 한입 베어 물며 더 이상 구경할 것 없는 창밖을 무심히 바라봤다.
짙은 안개가 온 마을을 뒤덮었다. 신비로운 분위기에 묘하게 빠져든다. 단순히 이동하는 날이라고만 여겼던 오늘은, 마지막까지 오스트리아의 다른 얼굴을 보며 이 또한 하나의 여행이 되고 있었다.
빈에 도착했다. 여전히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다. 오스트리아 전 지역에 비구름이 오신 것 같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땐 몰랐는데 다시 보니 기차역이 상당히 컸다. 요리조리 구경하다가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탑승했다.
비가 와서인지 예상시간보다 조금 늦게 공항에 도착했다.
"저기... 체크인을 하려고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하나요?"
전광판을 아무리 살펴봐도 내 비행기 정보만 보이지 않아 직원에게 물었다.
"기계에서 체크인하시면 돼요."
어? 그런데 기계에서도 안된다. 난감해하고 있는데 돌아오는 말은 비행정보가 아직 등록이 되지 않아서 그러니 나중에 다시 해보라는 것이었다.
출발 3시간 전이면 당연히 체크인이 가능한데 왜 안된다는 건지 성질머리 급한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가서 물어보니 안내데스크에 가서 확인해 보라는 말만 되돌아왔다.
"이상하네... 왜 지연됐지?"
체크인 수속을 도와주던 직원이 혼잣말을 했다. 또 연착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가... 불안함에 물어보니 내 비행기가 아니라고 했다.
휴... 인천까지 가는 보딩패스도 받았으니 별일이야 있겠나 싶어 우선 출국장으로 향했다. 시작부터 험난했지만 그럴 수 있지 하고 웃어넘겼다.
별일 아닌 것에 화를 내는 것은 감정낭비일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입국할 때 랜딩카드도 쓰지 않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도장 찍어줬던 것처럼 나갈 때도 쿨하게 보내줬다. 유럽에 있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하던 순간이었다.
면세 구역으로 들어온 나는 마지막으로 화폐 털기에 여념 없었다. 늘 그렇듯 사용하고 남은 돈을 모두 다 소진하고 나면 뭔가 큰 일을 해냈다는 생각에 개운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설렁설렁 게이트 앞에 도착했는데 잔뜩 화가 난 듯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알고 보니 이미 출발했어야 할 비행기가 뜨지 않은 것이다.
아... 그런데 하필 내가 타야 할 비행기 편명으로 통합 돼버렸다. 이제야 내게 티켓을 발권해 주면서 혼자 중얼거렸던 직원의 말이 이해가 되는 한편 이 많은 인원을 다 수용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됐다.
아무튼 사람들이 시끌벅적 난리를 피우는 통에 일찍 와서 기다리려 했던 것뿐이었던 나 역시 동요되어 이 상황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한 명씩 돌아다니면서 티켓 검사를 하는 동시에 자꾸만 사람들을 부르는 방송이 나왔는데 아무도 오지 않자 결국 어떤 사람이 나서서 중국말로 다시 방송을 했다.
그제야 알아들은 사람들이 한두 명씩 모여들었고 뭐라고 말했는지 갑자기 분위기가 좋아지며 사람들이 웃기 시작했다.
그렇다. 최저가를 애용하는 나는 경유도 서슴지 않았는데 이 비행기는 '베이징'까지 가는 것이었다.
계속된 기다림 끝에 드디어 탑승시간이 다가왔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든 틈에 끼어 차례를 기다렸다. 평소와 같이 보딩패스를 찍자 기계에서 쪽지가 나왔다.
"축하합니다! 비즈니스 좌석에 당첨되셨습니다."
좌석 번호가 바뀌었다며 건네받은 쪽지는 비즈니스 클래스로 가는 새로운 티켓이었다.
복권에 당첨된 기분이 이런 걸까? 어안이 벙벙했다. 살다 보니 별일이다 참... 이런 횡재가 어딨어!!!
얼떨떨함을 감추지 못한 채 평소 들락거리는 이코노미가 아닌 비즈니스 쪽으로 당당히 탑승했다.
온화한 미소로 스튜어디스들이 인사를 건넸다. 항상 가벼운 목례로 화답하는데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은 아줌마는 한껏 상기된 얼굴로 티켓을 보이며 인사를 했다.
좌석을 안내받았다. 캡슐처럼 생긴 의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짐을 정리하고 조금 있자니 승무원이 신문을 권했다. 딱히 관심 없어 사양하니 잡지도 있다면서 슬쩍 보여줬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Vogue'였다. 반가운 마음에 재빠르게 받아 들었다. 이륙하기 전에 음료 서비스도 나왔다. 오렌지주스를 마시며 잡지를 보는 여유로움이란... 이래서 돈을 더 주고서라도 비즈니스를 타는구나 싶었다.
이륙과 동시에 이번엔 식사주문이 들어왔다.
조리모를 쓰고 새하얀 유니폼을 갖춰 입은 사람이 다니면서 일일이 아침 메뉴와 저녁 메뉴를 신청받았다. 일단 시원한 맥주부터 주문했다. 애피타이저와 함께 서빙됐다.
쟁반 하나에 후식까지 모든 음식이 한 번에 나오는 기내식도 맛있다고 잘만 먹었는데 그간 볼 수 없던 식기류에 코스대로 음식이 담겨 나오니 하늘 위에서 대접받는 기분이 들었다.
메인요리인 스테이크와 볶음면까지 해치우고 나니 후식은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이것이 진정한 사육이로구나~!
배가 불러서 행복한 나는 눈치 보느라 하지 못했던 좌석을 있는 그대로 끝까지 뒤로 젖혔다. 완벽한 침대모드로 변신한 의자가 정말 안락하고 포근했다. 두 다리를 쭉 뻗고 눕자마자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떠보니 스튜어디스들이 음식을 서빙하느라 분주하다.
'아니, 아직까지 식사를 한단 말이야?'
주변 분위기가 밝은 것으로 보아 어제의 저녁식사가 아직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닌 듯했다. 시간을 보니 지금은 아침식사를 서빙하고 있는 중이었다.
눈만 잠깐 감았다가 떴을 뿐인데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버린 아주 진귀한 경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무릎 관절이 아파서 중간중간 일어나 줘야 하고, 깊은 잠은커녕 꾸벅꾸벅 졸다가 깨기를 반복하며 쪽잠을 자고, 깨어있을 때는 영화나 드라마를 시청하기도 하고, 재미없으면 스도쿠도 하고 그래도 시간이 가지 않을 때는 비행정보만 째려보며 도착까지 거리가 얼마나 남았나 지도 위에 비행기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는 맛에 하는 것이 비행이었거늘...
이것은 혁신이었다. 순간이동인 건가?
오랜만에 푹 자고 나서 개운한 몸을 일으켜 또다시 사육당할 준비를 해본다.
과일, 요구르트, 시리얼, 구운 토마토, 야채에그롤, 감자...
내가 이렇게 많이 주문했었나? 자고 일어나서 바로 못 먹을 줄 알았는데 음식이 잘도 들어간다. 거하게 식사를 마치고 나니 어느새 착륙할 시간이 되었다.
베이징에 도착하니 습하고 푹푹 찌는 공기가 아시아에 왔다는 것을 실감케 했다.
한국으로 가는 마지막 비행을 남겨두고 의자에 앉아서 꼭 기억해야 할 비즈니스 탑승기를 하나라도 놓칠세라 꼼꼼하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두 번 다시 겪지 못할 최고의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서...
홀로 처음 여행을 시작한 영국에 이어 캐나다와 오스트리아 여행은 내게 특별했다.
항상 A4용지에 여행 스케줄을 표로 만들어서 여행사에서 만든 프로그램처럼 정해진 경로대로 이동하며 다니던 내가 처음으로 큰 틀만 잡고 현지 상황에 맞춰서 유연하게 다녔던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반드시 이걸 봐야 해, 여기서는 이 음식을 꼭 먹고, 저기는 빼먹지 않고 가야지라는 무언의 압박이 사라지니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나만의 여행을 만들어 갈 수 있었다.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주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마지막이 주는 여운은 항상 쓰고 떫다.
씁쓸하지만 아이를 키우며 살림을 하며 이런 귀한 시간은 좀처럼 갖기 어려우니 매 순간 최선을 다 하며 여행을 다녔다.
그렇게 진심을 담아 꾹꾹 눌러 밟은 나의 발도장들이 있었기에 지나온 여행들을 추억하며 이렇게 또 다른 여행기를 완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동안 머나먼 타국에 아줌마 홀로 떨어져서 겪은 소소한 이야기들에 관심과 응원을 주신 작가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더불어 조만간 다시 연재될 '여행이 주는, 쉼표' 세 번째 이야기도 기대해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