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의 이중생활
오늘도 뛴다.
모처럼 산책에 기분이 말랑해진 비글 두 마리는 따뜻한 햇살과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취해 열심히 달려간다.
한 놈이 지나가며 툭 건드리면 다른 녀석은 다리 긴 놈을 잡기 위해 죽어라 쫓아간다.
남의 시선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녀석들은 언제나 외출을 나오면 사이좋게 꽁냥 거린다. 멀리서 보면 이상적인 남매의 행복한 모습이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고 있는 내겐 아옹다옹 싸우는 것이 복장 뒤집힐 일이다.
기나긴 연휴가 어김없이 찾아왔다. 언제나처럼 우리의 아침은 힘겹다.
노는 것에 세상 진지한 엄마에게 잘못 걸린 죄로 아이들은 졸린 눈을 비비며 무거운 아침을 맞이한다. 물론 아직까지 둘째 아이는 곧 잘 일어나지만 말이다. 큰아이가 어릴 적 그랬듯이...
꿀 같은 휴일, 아침잠을 뺏기는 것은 늘 피곤에 절어있는 남편에게 더욱 가혹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화창한 아침햇살이 투명한 창을 비추며 이래도 안 나올 거냐고 속삭이는데...
아침의 기운에 마음이 상쾌해진 나는 부랴부랴 남편을 깨웠다.
바로 오늘이야!
며칠 전 남편과 미술관 나들이를 다녀오면서 유난히 한복을 입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눈길이 갔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쑥쑥 커버리는 아이들에게 한복을 입히고 사진을 남겨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미리 얘기했었다.
하늘이 예쁜 오늘 출동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렇게 우당탕탕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경복궁'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대체 왜 한복을 입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투덜대면서도 착실하게 외출준비를 해줬다.
오전 9시 30분...
나들이를 시작하기엔 여전히 이른 시간이지만 우리보다 더 부지런한 사람들은 이미 도로 한복판에서 주차전쟁 중에 있었다. 대체 이 사람들은 언제부터 나와있던 것일까?
시간상 모두가 차 안에서 주차하기만을 얌전히 바라코 있을 수는 없었다. 남편이 기다리는 동안 아이들과 먼저 한복을 대여하기로 했다.
청명한 날씨를 만끽할 여유도 없이 차가운 아침 공기를 가르며 부지런히 걸어서 미리 봐두었던 한복집으로 갔다.
작은 아이의 한복을 먼저 고르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 큰아이의 옷을 골랐다. 환복을 마치고 나온 딸아이와 헤어스타일을 두고 마찰을 빚었다.
깔끔하게 땋아 내린 댕기머리가 하고 싶다는 녀석을 말리며 반묶음을 할 것을 추천했다. 머리카락이 얇고 숱이 많지 않아서 다 묶어 버리면 앙상한 모양새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현실을 모르는 녀석과 실랑이를 벌이면서도 큰 아이가 옷을 다 갈아입었는지 확인하느라 왔다 갔다 정신이 없었다. 결국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하고는 옷을 갈아입고 나온 큰아이를 봐주러 갔다.
하늘색 한복이 제법 잘 어울렸다.
한 녀석의 미션을 클리어 한 뒤 다시 달려오니 꼬마는 이미 수줍게 거울 앞에 앉아있었다. 엄마 없이 혼자서 원하는 헤어스타일을 말하고 액세서리를 고른 뒤 얌전히 머리 손질을 받고 있는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소심한 엄마에게는 큰 숙제였을 저런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지 내 눈에 비친 딸아이는 제법 큰 모습이었다.
"엄마가 원하는 스타일로 해달라고 했어. 머리장식도 고르라고 해서 옷색깔이랑 비슷한 색으로 고르고."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예쁜 장신구와 함께 머리카락까지 땋아 내린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녀석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어머나~ 이게 누구야~! 정말 예쁘다. 머리장식도 혼자서 씩씩하게 잘 골랐네. 대단해!"
우쭐해진 녀석을 한껏 치켜세워준 뒤 우린 발 빠르게 다시 경복궁으로 이동했다. 남편은 아직 주차장 입구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근데 옷이 좀 신기해. 품이 커서 그런가 그 틈으로 바람이 다 들어와."
오랜만에 입어보는 한복이 신기했는지 어떻게 돌아다니냐며 부끄러워하던 아들 녀석은 신이 나서 한껏 떠들어댄다.
"한복 입은 사람은 다 외국인밖에 없어!"라고 덧붙였지만 이내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전통의상을 입고 제법 차분해진 녀석들을 앞세우며 부지런히 사진도 찍어줬다.
매표소 앞에 도착한 우린 서둘러 줄을 섰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받아 든 티켓 한 장에는 성인 두 명이라고 적혀있었다. 한 장은 남편에게 전해주고 미리 입장하려 했는데 그러지 못하게 되자 어찌해야 할지 난감했다.
입장권을 들고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던 우린 결국 경복궁 담벼락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으며 남편을 기다렸다.
한복을 대여한 지 한 시간을 훌쩍 넘긴 뒤에야 완전체가 된 우리 가족은 그제야 경복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돌아가는 시간도 계산하면 남은 시간은 대략 40분 남짓이다.
오늘 궁궐은 오직 사진 속 배경이 되어야 한다.
여유가 없는 우리의 목적지는 단 하나, '경회루'이다. 이미 여러 번 왔던 곳이라 길을 잘 아는 아이들과 근정전 앞을 지나면서도 재빠르게 사진을 남기며 호숫가로 향했다.
"빨리 와봐. 여기 잠깐 서볼까? 둘이 나란히 서야지. 아니 아니 앞에 보라고. 잠깐만! 그대로 있어봐~~ 뒤에 사람들 지나가고... 이제 뒤돌아봐. 그렇지 그렇지. 마주 보고."
속사포 랩을 쏟아내는 말들에 아이들은 꼭두각시가 되어 느릿느릿 움직여줬다. 한 놈이 앞을 보고 있으면 다른 놈은 뒤를 보고 있고, 나란히 서라고 하면 멀찌감치 떨어진다. 마주 보라고 하면 서로 반대방향으로 몸을 튼다.
엄마의 주문에 정반대로 움직이는 녀석들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한껏 올라왔다. 그런 아이들에게 나는 빨리빨리를 계속 외쳐댔다. 그러다가 문득, '지나가는 외국인들도 이 말은 다 알아듣겠지?'라는 생각이 들자 뒤늦게 밀려오는 민망함에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시간이 촉박한 우린 최대한 민첩하게 경복궁 안을 휘저으며 짧은 시간 안에 천 장이 넘는 사진을 남겼다.
아이들의 사진을 보고 사람들은 남매가 어쩜 이렇게 사이가 좋냐고 한다. 모두가 엄마의 지휘아래 철저히 연출된 사진인 것을 모른 채 속고 있는 것이다.
앞에 봐야지. 둘이 같이 서. 좀 더 붙어. 마주 봐. 뒤 돌아. 웃어야지~~!!
끊임없이 쏟아지는 주문에 마지못해 움직이는 녀석들을 한 컷이라도 더 담겠다고 카메라 셔터를 연속해서 눌러대며, 그렇게 열댓 장을 찍은 결과 겨우 건진 사진들일뿐이다.
보기에는 참으로 다정하고 즐거워 보이지만 현실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인형일 뿐이었다.
아무렴 어떠랴... 훗날 아이들이 기억할 것은 오직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장면들 뿐일 텐데... 투닥대던 것들은 다 잊히고 고운 추억만 남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며칠 뒤 꼬마는 학교에서 연휴에 있었던 일로 경복궁에 간 일을 발표했다고 했다. 녀석에겐 그날의 하루가 어떻게 기억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