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온 걸 환영해!
여권과 호텔바우처등 예약확인에 필요한 서류를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룸키를 내주지 않는 직원과 피곤한 대치중에 있다.
고객정보 보호 규칙에 따라 너무나도 열심히 일하고 있는 직원을 설득할 방법이 없다.
하긴... 이 종이 쪼가리가 뭐라고...
굴러다니는 종이를 주워왔을 수도 있고, 누군가 휴지통에 버렸을지도 모를 종이를 건져왔을 수도 있다.
우연히 예약번호가 맞아떨어지고, 마침 체크인 날짜가 오늘일 수도 있다. 아주아주 극한의 희박한 확률로 내 여권번호와 이름이 예약자와 동일할 수도 있겠지...
'가만,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장시간의 비행으로 피곤에 지쳐 정신이 반쯤 가출하고 있을 때, 아주아주 가까운 곳에서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하나님, 부처님, 알라, 시바(힌두교의 신), 조상님이시여 감사합니다!
내가 부를 수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신들께 감사를 외쳤다. 낯선 땅에서 가장 절박한 순간에 짠~ 하고 등장한 J는 '신'과 같았다.
극본도 없는 현실세계에서 영화 속 한 장면이 순식간에 완성됐다.
"내가 늦게 왔다고 계속 룸키를 줄 수 없다는 거야. 너는 자고 있을 거 같고 로밍도 안 해와서 난감해하고 있었지. 근데 진짜, 왜 내려온 거야?"
"아... 샤워하는데 욕조가 막혀서 물이 넘치잖아. 방을 바꿔달라고 하려고 내려왔지."
이쯤 되면 나는 막힌 욕조에게도 고마워해야 한다. 정말 기막힌 타이밍이다. J는 곧바로 직원에게 방을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그 뒷모습이 듬직해 보였다.
Welcome to NY
아침 햇살이 따스하게 내려오는 뉴욕의 거리는 아직 화사한 봄이다. 길가에 테이블이 있는 노천카페가 유혹한다. 배가 고픈 우린 뭔가에 홀린 듯 테이블에 앉았다. 눈에 띄는 샐러드와 햄버거를 주문했다.
뉴욕에서 먹는 첫 식사였다.
두 여자는 모처럼 여유가 넘치는 아침을 만끽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부드러웠다. 급할 거 하나 없는 지금의 아침이 참으로 좋다.
곧이어 나온 음식에서 올라오는 향신료 냄새가 코 끝을 자극했다. 비로소 외국땅을 밟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햄버거를 반으로 자르며 J와 오랜만에 수다를 이어갔다.
오래전부터 꿈꿔오던 이 장면은 믿기지 않은 현실이 되었다. 별거 아닌 식사자리였지만 지금 이 순간은 한없이 소중하다.
식사를 마친 우린 지나는 길에 눈에 띈 기념품가게로 들어갔다. 그 어떤 랜드마크보다도, 내가 현지에 뚝 떨어져 있음을 가장 실감하게 해주는 현실적인 공간이다.
뉴욕을 담은 스노우볼, 마그넷, 열쇠고리등이 질서 정연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곳곳에 'NY'글자를 품은 머그컵과 티셔츠,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그림액자들 또한 사이사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온통 뉴욕을 말하고 있는 물건들로 꽉 찬 가게 안에서 비좁은 통로를 힘겹게 지나가는데 가방에 뭔가가 걸려서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하고 내려다보는데, 맙소사!
자유의 여신상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설상가상으로 '자유와 민주주의의 빛'을 상징하는 횃불을 들고 있던 그녀의 오른팔이 부러져 있었다.
당황한 나는 물건을 집어 들며 무의식적으로 가격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크게 비싸진 않았다.
"J! 어떻게 해... 지나가다가 가방에 걸렸는지 이게 떨어졌어."
사색이 된 나는 울상을 하며 J에게 상황을 알렸다. 구경하다 말고 달려온 J는 부러진 자유의 여신상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봤다.
"어쩌다가 그랬어! 완전히 부러졌네..."
"가서 변상한다고 하면 될까? 역시 뭐라도 더 사야겠지?"
말이 통하지 않는 타지에서는 작은 실수마저도 크게 다가온다.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기도 하거니와 상황을 잘 헤쳐나갈 만큼 의사소통에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혼자가 아니다. J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되었다.
"괜찮아. 가서 솔직하게 얘기하고 물어주면 될 거야."
J의 말에 용기를 얻는 나는 눈에 보이는 아무거나 집어 들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계산대로 향했다.
"아저씨, 정말 정말 죄송해요. 지나가다가 실수로 이게 떨어졌는데 부러졌어요. 제가 구매할 테니 같이 계산해 주세요."
미안한 마음에 들고 간 기념품과 부러진 자유의 여신상 마그넷을 내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 이런! 놀랐겠군요. 괜찮아요. 장사하다 보면 이런 일은 흔히 있어요. 지금 여행 중인가요?"
"네? 아, 네..."
인자한 미소를 띤 채 별일 아니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엉겁결에 대답했다.
"오늘 아가씨는 정말 운이 좋네요. 이곳에 온 기념으로 줄 테니 그냥 가지고 가요."
짧은 은빛 머리카락이 매력적인 할아버지는 환하게 웃어 보이며 자유의 여신상을 부러진 팔과 함께 신문지에 돌돌 말아 포장하기 시작했다.
"네? 그래도 판매하시는 건데... 제 실수로 부러진 거니 제가 살게요."
크게 혼날 것을 생각했던 나는 예상밖의 반응에 깜짝 놀란 토끼눈이 되어 말했다.
"허허... 괜찮아요. 이건 내가 아가씨에게 주는 선물이라우. 여긴 뉴욕이니까."
곱게 포장한 자유의 여신상과 기념품을 담은 봉지를 건네며 아저씨는 영화 속 대사처럼 말씀하셨다.
"Welcome to New York!"
평생 잊지 못할 뉴욕을 선물 받았다.
밝은 목소리로 환영의 인사를 건넨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J와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햇살 가득한 거리로 나왔다.
아름다운 세상이다!
한층 포근해진 공기가 주위를 에워쌌다. 같은 공간인데 10분 전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으로 다가왔다.
마침내 우린, 진짜 뉴욕에 들어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