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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채색 월드

우리 이렇게나 화려했잖아.

by JULIE K

숨 막히는 무더위가 며칠째 심신을 지치게 하고 있다. 해가 갈수록 점점 뜨거워져가는 지구의 안위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방법을 찾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밖에서 더위를 잔뜩 집어삼키고 기진맥진이 된 몸에게 휴식을 주고 있을 때였다. 역시나 나의 평온한 시간을 지켜보지 못하는 딸아이가 촐랑거리며 다가왔다.


"엄마, 내가 드디어 밖에서 입을 때 입는 옷 말이야. 좋아하는 색이 생겼어!"


응? 그게 무슨 말이지? 밖에서 입는 옷? 좋아하는 색? 정리되지 않은 말에 궁금해할 여유도 없던 나는 최소한의 예의로 눈동자만 힘주어 눈을 크게 떴다. 미적지근한 내 반응에도 할 말이 분명하게 많던 녀석은 신나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바로바로오~ 회색, 흰색, 검은색!"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노란색, 핑크색은 이제 못 입겠어. 후드티가 좋고 바지도 추리닝인데 짙은 회색 같은 게 좋아."


아... 올 것이 왔다.


딸을 둔 엄마들에겐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예쁜 옷을 사는 즐거움이 있다. 인형 같은 꼬마친구에게 평소 엄두도 내지 못하는 알록달록한 원피스를 입히고 기상천외한 머리땋기 스킬을 발휘하며 어릴 적 못 다 이룬 로망을 실현한다.


그래서 딸의 방은 핑크로 물들이고 옷장 안은 형형색색으로 채워 넣는 것이다. 물론 개인 취향에 따라 이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엄마들의 작은 행복인 인형놀이는 오래가지 못한다. 아이들이 성장하며 사춘기가 다가오면서 자연스레 변화가 생기고 컬러풀했던 세상은 점점 색을 잃게 된다고 했다.


철부지 딸아이에게도 영원이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뜬금없이...

"고학년이라서 그런가 봐. 촌스러운 건 이제 안 돼요~!"


수다쟁이 꼬마아가씨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말에 음률을 얹었다.

"근데 내가 아까 회색이 좋아졌다고 했는데 왜 놀랬어? 내가 고학년이 된 게 신기해? 나이가 들수록 찐한 게 좋은 거 같아. 이제 다른 색은 화려하고 핑크색이 제일 촌스러워. 우리 반에 핑크색, 노란색을 입은애가 없다니까."

우리 이렇게나 화려했는데...


망했다!!


나는 아이의 옷을 살 때 항상 질 좋은 옷을 크게 산다. 물론 내년까지도 실컷 입을 수 있을 만큼 사이즈는 여유롭다. 저 옷들을 다 입어줘야 하는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란 말인가... 후...


아이의 신경을 최대한 거슬리지 않게 입을 꾹 닫고 최소한의 리액션만 해주었다.


이번 여름에 아직 옷장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옷들이 떠올랐다. 환경을 생각해서라도 더 이상의 쇼핑은 안 된다. 녀석의 여름옷들 이미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 집에 있는 옷들은 다 입어주는 게 어때? 옷이 저렇게나 많은데 또 살 수는 없잖아."


용기 내어 딸에게 한마디 던졌다. 다행히 녀석은 내 말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오빠에게서 앞서 흰색 티셔츠를 몇 장 얻어 놓아 마음에 여유가 있는 듯 보였다.


옆에서 기분 좋을 때 칭찬과 함께 한 번씩 찔러주면, 아마도 녀석은 내가 권하는 옷들을 입어줄지도 모른다.


이제 천천히 내려놓는 연습 남았다. 아이의 성장과 변화를 받아들일 간이 필요하다.

어느새 커서 내 옷을 입은 딸



딸과 한차례 옷에 관한 이야기가 오간 뒤 우린 별일 없었다는 듯 일상을 보냈다. 녀석은 내뱉은 말들을 열심히 실천하며 회색 추리닝 바지에 무채색 티셔츠만 쏙쏙 골라서 옷을 입었다.


옷장 속 한편에서 곤히 잠자고 있는 예쁜 티셔츠와 원피스들이 눈에 밟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바로 어제, 일 끝나고 집에 와서 녀석을 마주하는 순간 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바로 형광빛이 도는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던 것!


더워진 날씨에 시원한 소재의 옷을 찾다가 집에서 입을 생각으로 꺼낸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아침, 녀석은 아무렇지 않게 분홍색 티셔츠를 골라 들었다.


그럼 그렇지... 이렇게 갑자기 변할 리가 없잖아?


우리에겐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 딸에게서 색을 아주 천천히 조금씩 빼내갈 생각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완벽한 무채색으로 변하기 전까지 집에 있는 화려한 옷들을 한 번이라도 더 입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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