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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보다 빨라야 하는 건

순간 판단력

by JULIE K

"어머니, OO가 갑자기 쓰러졌어요. 학교로 좀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침의 평화를 깨버린 단 한 통의 전화벨이 울렸다. 핸드폰 화면에 뜬 딸의 학교 이름을 본 순간 고민에 빠졌다.


이 시간에 학교에서? 왜지?


아주 잠시잠깐 수많은 생각들이 빛의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네~ 여보세요?"


쓸데없는 생각을 거두고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사로잡힌 채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OO어머님. 담임교사입니다..."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의 신경은 곤두서고 긴장감은 한껏 올라갔다.


보통 이 시간에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는 것은 지극히 좋은 일은 아니란 뜻이기 때문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친구랑 싸운 건가? 그럴 리가... 녀석은 교우관계가 완만한 편이다. 우연한 사고일 확률이 더 높다.



예전에도 이런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


아들이 유치원을 다니고 있을 때였다. 아이들이 영유아 시기에는 비교적 담임 선생님과 통화할 일이 잦았다. 소소한 이야깃거리들이 한창 생겨날 시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 좋은 소재로 통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날도 그랬다. 선생님은 다급한 목소리로 지난 상황을 설명하셨다. 아들이 친구랑 장난치며 놀다가 친구의 실수로 의자에 부딪혀서 인중이 찢어졌다는 얘기였다.


아이가 다쳤다는 소식에 깜짝 놀라서 바로 병원으로 데리고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체육시간에 발야구를 하다가 잠깐 보니 OO의 입술색이 파랗더라고요. 잠깐 쉬라고 했는데, 한쪽에 앉아서 물을 마시고 어오다가 갑자기 쓰러졌어요. 지금은..."


"네? 애가 쓰러지다니요?"


쓰러졌다는 말에 꽂힌 뒤부터 나의 심박수가 요동쳤다. 선생님은 차분한 목소리로 당시 상황을 몇 번이고 반복하며 열심히 설명해 주셨다.


"친구들이 부축해주고 있었는데 몇 걸음 걷다가 쓰러졌어요. 넘어지면서 앞에 철문에 부딪히는 바람에 양쪽 무릎이랑 얼굴에 상처가 생겼어요. 쓰러질 때 근처에 큰 돌이 있었는데 다행히 그쪽은 피했어요. 아니었으면 얼굴이 크게 다쳤을 거예요."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온신경을 집중하며 듣고 있는데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꼬마는 길을 가다가 넘어져도 반사신경으로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던 아이였다. 절대 우는 법이 없었으며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길을 걷던 녀석이다.


우연한 사고로 넘어져서 무릎이 크게 깨졌을 때도 엄마인 내가 더 호들갑 떨며 많이 아파했지 녀석은 스스로 상처치료도 씩씩하게 잘했었다.


그런 아이가 쓰러지다니!!


체육교사가 따로 있어서 담임선생님이 직접 수업을 하시진 않았을 텐데 친구들이 부축을 해줬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갔다. 더군다나 넓은 운동장 한쪽 계단에 앉아 있었을 텐데 자기 철문은 어디서 나온 걸까?


그나저나 폭염인 날씨에 체육관을 놔두고 왜 운동장에서 수업한 거지?


오만가지 생각들이 뒤엉켰지만 진위여부를 떠나서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의 상태였다. 전화상으로만은 녀석이 어느 정도로 다쳤는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의식을 잃지는 않았다고 했지만 쓰러졌다는 말이 가슴속에 콕 박혔다.


"제가 보건실로 가면 될까요?"


"네, 지금 보건 선생님이랑 함께 있어요."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 없이 바로 가방과 차키를 집어 들었다.


'가만... 그런데 병원을 어디로 가야 하지? 동네 소아과로 가야 하나?'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녀석이 쓰러졌고 얼굴과 무릎을 다쳤다고 했다. 안색이 창백했고 입술색이 새파랬으면 단순히 넘어진 걸로 보긴 어렵다. 의식이 있다고 했지만 잠깐동안 기절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건 무조건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


바로 인근에 있는 종합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지금 바로 진료를 받아 볼 수 있는지 물어봤다. 다급한 목소리에 상담사는 해당 진료과 간호사와 통화를 한 뒤 시간을 조율해 줬다.


"11시까지 오시면 바로 진료 보실 수 있어요."


됐어! 이제 빨리 가면 돼.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


혼잣말로 끊임없이 '괜찮아'를 외치며 운전대를 잡았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조심스럽지만 최대한 빠르게 달려갔다.


학교 앞에 차를 세워둘 수 없어서 인근 편의점 앞에 잠시 주차를 하고 뛰기 시작했다. 이미 소식을 접한 경비원 아저씨가 문 앞에 마중 나와 계셨다.


아저씨는 여기서 기다리면 곧 나올 거라고 말씀하신 뒤 어딘가 전화를 걸어 나의 도착 사실을 알렸다.


정문 앞에서 기다리는 마음은 상당히 초조했다. 저 계단을 걸어 내려와야 하는데 혼자서 내려올 수 있을까? 누가 부축 해주려나? 그런데 왜 이렇게 안 내려오지? 분명 보건실로 오라고 했는데 왜 기다리라고 할까? 보안 때문이겠지? 나는 학부모인데... 학부모도 함부로 들어갈 순 없겠지...


불안감이 커져갈수록 머릿속이 복잡했다. 초조한 마음에 애꿎은 시계만 계속 확인했다. 안 되겠다 싶어 경비아저씨게 양해를 구한 뒤 차를 정문 앞으로 가지고 왔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렸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딸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대체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거야? 걷지 못하는 건가?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아니지, 그럼 구급차를 불렀겠지.'


병원에서 얘기한 시간이 다가오자 신경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발을 동동거리며 아이가 어디에서 내려올지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자 경비아저씨가 다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아... 그래요? 난 여기서 기다리라고만 했지. 알았어요."


귀가 쫑긋 했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통화가 끝난 뒤 보건실로 가라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물었다.


"보건실은 어디에 있어요?"


"저 계단으로 올라가서... 2층에 올라가면 왼쪽으로..."


필요한 정보를 듣고 바로 뛰기 시작했다. 총알같이 튀어 나가는 내 뒤통수에 대고 "왼쪽으로 뛰어요!"라고 아저씨가 소리쳤다. 손을 흔들어 보이며 열심히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상황이 급박하니 초인적인 힘이 생겨났다.


단숨에 건물 안 2층에 올라가니 정면에서 살짝 왼쪽으로 보건실이 보였다. 숨이 차오르자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문 앞에는 아이의 신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힘이 빠지며 가슴이 철렁 주저 않았다.


떨리는 손길로 문을 열었다. 정면에 딸아이가 맥없이 앉아 있었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조심스럽게 딸에게 다가갔다. 어디라도 부러질까 봐 와락 끌어안을 수도 없었다.


"혈압이 굉장히 낮아요. 다행히 다시 올라오고 있기는 한데 혹시 몰라서 시간별로 혈압체크를 했어요."


보건 선생님이 종이쪽지를 건넸다. 아이를 관찰하며 기록한 것이라고 의사 선생님께 전달하면 된다고 하셨다. 연신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딸을 부축해서 나왔다.


뼈만 만져지는데 화가 났다. 왜 이렇게 마른 건지... 안 먹어서 영양실조라도 걸린 게 아닐까 걱정됐다.


"괜찮아. 혼자 걸을 수 있어."


"안돼, 그러다가 또 넘어지면 어떡하려고. 계단은 특히 조심해야지. 천천히 내려가자."


엉거주춤 부축하는 내가 불편했는지 녀석은 혼자 걸으려고 했다. 빼려는 팔을 더욱 꽉 잡고 놓지 않았다.



나 지금 회사에 얘기하고 나왔어.
병원으로 바로 갈게.


아뿔싸! 남편은 그새를 못 참고 회사에서 나왔다고 했다.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이미 나왔다며 병원으로 오겠다고 했다. 괜히 연락해서 일하는데 신경 쓰이게 한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든든하니 위로가 됐다.


딸에게 가는 동안 물을 좀 마시라고 말한 뒤 곧장 병원으로 출발했다.


"학교에서 혈압을 체크해서 적어주셨는데 의사 선생님께 보여드리면 될까요?"


접수증과 쪽지를 간호사에게 전달하며 물었다.


"저 주시면 돼요. 안쪽에서 키랑 몸무게 먼저 잴게요."


"네."


아이와 함께 접수처 옆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키와 몸무게를 측정한 뒤 혈압도 한번 재야 한다고 했다.


"아이고... 왜 이렇게 말랐어? 밥 잘 안 먹는구나? 아이가 편식이 심하죠?"


상황을 미리 전달받아서 알고 있던 간호사분께서 살갑게 말을 걸어주셨다.


덕분에 마음이 편해진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식이 심해서 걱정이라며 신세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내 말에 씩 웃어 보이며 아이에게 골고루 잘 먹어야 한다고 대신 말씀해 주셨다.


요즘 날이 더워서 이렇게 쓰러져서 오는 학생들이 더러 있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날씨 때문일 가능성이 높으니 너무 걱정 안 해도 된다는 말에 마음속에 박혀있던 무거운 돌덩이가 떨어져 나갔다.


"이상하네... 혈압이 너무 낮은데?"


옆에서 아이의 혈압을 체크하고 있던 다른 간호사분이 고개를 저었다. 아... 다시 긴장감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나라도 잘 못 될까 숨죽여 지켜봤다.


"이거 말고 유아용으로 다시 잴까 봐요. 팔뚝이 얇아서 잘 안 잡히는 거 같아요."


간호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밖에 있던 또 다른 간호사분이 유아용 혈압계를 가지고 들어왔다.


커프가 확실히 작았다. 다시 혈압을 측정하니 다행히도 정상 수치가 나왔다. 학교에서 사용한 혈압계 커프가 성인용이었는지 크기를 아이에게 확인한 뒤 팔뚝이 가늘어서 혈압이 계속 낮게 측정된 거 같다고 얘기해 주셨다.


아직 진료는 시작도 안 했는데 걱정거리가 절반은 날아가버렸다. 간호사분들께 잊지 않고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진료실로 들어갔다.


흰머리가 소복이 내려앉은 교수님께서 흰가운을 입고 큰 책상 앞에 앉아 계셨다. 아이의 부은 입술과 이미 한차례 처치받아서 밴드가 붙여져 있는 두 무릎을 보시더니 나보다 더 안타까워하셨다.


"아니, 어쩌다가 이렇게 다쳤어 그래?"


인자한 인상의 의사 선생님께서는 아이에게 당시 상황을 자세히 확인하셨다. 꼼하게 진료를 보신 뒤 녀석에게 해당될 수 있는 병명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두꺼운 전공책까지 펼쳐 보이며 말씀하시는데 사실 어려운 용어들이라 기억에 남는 게 하나도 없었다.


한 가지 중요한 건 딸아이는 그 병에는 해당되지 않는 거 같다는 말이었다. 단순히 쓰러진 건지, 의식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 당시 상황이 중요하다는 걸 처음 알았다.


별일은 없겠지만 일단 왔으니 검사를 이것저것 받아보기로 했다. 피도 뽑고 어지럼증 검사도 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옥 같았지만 시간은 다행히 정확하게 흘러가주었다.




"검사 결과 큰 이상은 없네요."


아... 이 한마디가 그렇게 듣고 싶었던 걸까? 의사 선생님의 밝은 표정에 찝찝하게 남아있던 걱정거리들이 말끔하게 씻겨나갔다. 아까 설명했던 병들과는 상관이 없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며 일목요연하게 씀해 주셨다.


세상은 다시 밝아졌고 축 쳐져있던 꼬마의 얼굴에도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피검사결과 빈혈수치도 정상이에요. 다른 검사결과는 오후에 나오니까 그때 전화로 알려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고생했어요. 이제 밥도 잘 먹고 편식하면 안 된다."


의사 선생님은 아이에게도 당부의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세상을 되찾은 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분들께 연신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수납창구로 향했다.


때마침 남편이 병원에 도착해서 수납하는 것을 도와줬다.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고 크게 이상이 없다는 말에 안도했다.


큰 일을 치르고 기운이 다 빠졌을 꼬마와 나를 위해 우린 숯불갈비집으로 향했다. 단백질로 기력을 되찾은 뒤 이어서 약국쇼핑을 시작했다. 처방받은 약과 연고를 사고 습윤밴드도 넉넉히 구매했다.


모든 일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살아난 딸은 참지 못하고 그동안의 일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가 쓰러진 게 아니고 부축해 준 친구가 나를 잡고 가다가 중심을 잃어서 그냥 넘어진 거야. 넘어지는 순간도 다 기억이 난다니까? 그러니까 얼굴은 말이야... 보건실로 가는데... 아니, 아니라고! 나는 그냥 넘어진 거라고!"


꼬마의 수다에 마음이 놓였다. 평소 쩌렁쩌렁 울려대던 녀석의 목소리가 더 이상 거슬리지 않았다.

"그래, 그래... 넘어진 거야. 길 가다가 그냥 넘어진 거였어. 상처치료 잘해서 빨리 낫자."


순간 기절해서 쓰러진 건지 진짜로 단순하게 넘어진 건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다시 지지고 볶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의사 선생님은 약속한 대로 오후에 전화를 주셨다. 남은 피검사 결과도 다 정상인데 비타민D 수치만 낮게 나왔다고 하셨다. 크게 걱정할 수치는 아니니 야외활동 많이 시켜주고 밥 잘 챙겨 먹이라고 하셨다.


나는 핸드폰을 들고 록 보이지는 않지만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진심을 담아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었다.


한결 홀가분해진 나는 저세상급 추진력으로 남편과 함께 곧장 백화점으로 가서 가족을 위한 영양제를 구입했다. 평소 영양제를 잘 챙겨 먹지는 않지만 부족한 영양소는 채워주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꼬마를 위한 칼슘, 비타민 D를 집어 들었다. 포도맛의 젤리는 녀석의 취향에 딱 맞아떨어졌다.


매일 밤 영양제를 챙겨 먹던 녀석은 덕분에 건강해지고 키가 부쩍 큰 거 같아 마음에 든다며 한 통 더 사달라고 했다.


건강을 되찾은 꼬마를 위해 나는 오늘 또다시 비타민을 사러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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