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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경고

변화의 시점

by JULIE K

선선한 가을의 문을 열어 줄 처서의 마법이 통하지 않는 말 오후였다. 지칠 줄 모르고 끝없이 내리쬐는 강렬한 태양에 지구는 속절없이 타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더위가 부른 갈증은 계속해서 시원한 무언가를 찾았고, 이른 아침부터 과학관에 다녀온 뒤 피곤했는지 곤히 잠들어 있는 부자(父子)를 깨우고 싶지 않아 딸에게 살며시 카톡을 보냈다.


딸~ 자니?


아니요.


엄마랑 나갔다 올까?


어디요?


... 공차?


네. 헤헤~ ^^


조용히 카톡을 주고받은 두 여자는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 현관 앞에서 접선했다. 아빠와 오빠가 자고 있는지 계속해서 확인하며 조심조심 움직이는 딸아이는 이 상황이 재밌었는지 눈만 마주쳐도 웃어댔다.


하지만 밖으로 나온 우린 곧바로 삐그덕 대기 시작했다.


운동삼아 동네를 좀 걷고 싶었던 나와 달리 녀석은 전혀 걷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날도 더운데 꼭 걸어야 하냐며 따져 들기 시작했다.


"그럼 갈 때는 버스 타고 올 때는 걸어오자. 음료를 들고 버스는 못 타니까. 어때?"


"그냥 거기서 마시고 버스 타면 안 돼?"


"점심 먹은 것도 소화시킬 겸 조금은 걷는 게 좋지 않겠어?"


"싫어. 덥단 말이야!"


뜨거운 태양아래서 두 여자는 한 치의 양보 없이 대치상황에 놓였다, 버스를 타고 싶은 꼬마와 걷고 싶은 엄마는 짧은 시간이지만 자신의 생각을 어필하는데 집중했다.


"에이, 그럼 가지 말자."


몸을 틀어 다시 집으로 올라가려는데 딸아이가 다급하게 말했다.


"아, 알았어. 가 그냥."


극적으로 타결한 우린 언제 그랬냐는 듯 손을 잡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어느새 내 키만큼 쑥 올라온 딸과 나란히 걷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손도 나만큼이나 커져있네... 언제 이렇게 컸을까?


항상 철딱서니 없는 막내딸이었는데 녀석의 성장속도에 불이 붙은 상태인 것 같다.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 안 가서 내렸다. 다시 또 걸으려고 하니 녀석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또 걸어야 돼?"


"바로 저기야. 지금 보이잖아. 조금만 걸으면 되는데 머..."


"그냥 가게 앞에 내려주지. 그럼 안 걸어도 되잖아."


"음... 버스가 택시는 아니잖아?"


날이 더워 한 발짝도 걷고 싶지 않았던 녀석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버스가 가게 앞에 내려주면 좋지 않냐며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치기 시작했다.


고작 100m 정도 되는 거리지만 꼬마는 가는 내내 입이 쉬지 않았다.


아... 내가 왜 나오자고 했을까...


드디어 시원한 매장에 도착했다.


기다리던 음료를 받아 들고 밖으로 나서며 딸아이가 말했다.


"근데 이제 나 못 볼 거야. 밖으로 안 나올 거거든. 점점 I(MBTI)로 변하고 있는 거 같아. 집이 더 좋아졌어."


뜬금없이 녀석은 선전포고를 했다.


하지만 크게 심각하게 듣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 들어앉아 밖으로 한 발짝도 내딛지 않을 것 같던 큰아이도 별일 없이 안팎을 드나들며 잘 지내왔기 때문이다.


요 녀석도 큰 탈없이 잘 지나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것 같다.


"근데 엄마가 이렇게 주스 사준다고 해도 안 나올 거야?"


"음... 오빠도 주스 사준다고 하면 잘 나왔으니까 나도 그러지 않을까?"


역시나... 녀석은 고단수다. 주스 사 줄 쌈짓돈을 잔뜩 마련해 둬야겠다. 하하~!



"또 먹어?"


냉장고에서 피자를 꺼내서 데우려던 딸아이는 내게 들킨 게 민망했는지 씩 웃어 보였다.


녀석은 좋아하는 미역국에 밥을 두 공기나 말아먹고 양에 안 차는지 이번엔 피자 한 조각을 꺼내 들었다.


갑자기 커버린 키만큼 몸이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한 번에 먹는 양은 그대로지만 요즘 들어 먹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


이번엔 육개장에 밥을 세 번이나 리필해서 먹는다. 할머니표 육개장을 가장 좋아하는 꼬마는 정말 맛있다며 연신 싱글벙글이다.


맨날 안 먹는 모습만 보다가 갑자기 잘 먹어주니 신기하면서도 낯선 변화가 싫지 않다.



우리 집엔 금기된 식품이 있다.


바로 아이들 키성장을 대표하는 우유다. 녀석들이 어릴 때는 잘 마셨는데 어느 순간 우유만 마시면 배가 아프다고 했다.


정말 신기한 것은 알게 모르게 우유가 들어간 음식들은 잘 먹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우유를 먹이려고 얼마나 애써왔던가!


우유에 바나나, 토마토, 블루베리 등 각종 과일과 견과류를 함께 넣고 주스를 만들어서 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뭐든지 금방 질려버리는 녀석들은 이마저도 마시지 않았다.


유당 불내증이 진짜로 있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먹기 싫은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무엇이 됐든 억지로 먹는 것은 좋지 않기에 최근 몇 년간 우유는 소비품목에 없었다.


그렇게 우유를 잊고 살던 중 개학을 하고 학교에 갔다 온 큰아이는 방학 동안 친구들이 부쩍 컸다고 했다.


휴... 좀! 잘 먹고 많이 먹고, 잠도 잘 자고 어? 운동도 열심히 하고, 활동을 해야 키도 크지!


잔소리 모드가 장착되려는데 순간 번뜩이며 떠오른 것이 있었다.


소화가 잘 되는 우유, 락토프리


그래. 이거라도 사서 먹여보자.


"엄마가 새벽배송으로 우유를 주문하려고 하는데 이건 소화가 잘 되는 우유라서 속이 불편하진 않을 거야. 한번 먹어 볼래?"


"......"


역시나 녀석은 말이 없다. 생각보다 행동이 빠른 나는 다음날 아침 샌드위치를 준비하고 일단 주문해 버린 우유도 함께 내놓았다.


아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일단 한번 마셔봐. 괜찮을 거야. 샌드위치랑 같이 먹으면 맛도 안 날걸?"


녀석은 억지로 먹어줬다. 늦게 일어난 딸아이도 눈치를 살피더니 우유를 꺼내서 마셨다.


"엄마! 진짜 이 우유는 배가 안 아파. 정말 신기하네? 학교 갔다 와서 우유 다 마셨어. 또 사줘."


기적이 일어났다. 딸아이의 입에서 우유를 사달라는 말이 나올 줄이야!


"그런데... 기왕이면 맛있게 먹으면 더 좋잖아? 우유에 타먹게 제티도 사주면 안 돼요?"


지금이 기회다 싶었던지 녀석은 제티도 타서 먹고 싶다고 꼭 쿠키앤크림 맛으로 사달라고 성화다.


못 이기는 척 바로 마트로 달려갔다. 과감하게 1L짜리 두 팩을 샀는데 이틀도 안 돼서 사라졌다. 아이들은 확실히 뭘 타서 먹으니까 더 먹게 된다며 계량컵까지 꺼내서 정량대로 조합해서 마시는 열정을 보였다.


우유가 사라진 지 오래된 우리 집에 처음으로 우유붐이 일기 시작했다. 마친구는 오늘 아침에도 꼭 우유 사 와야 한다고 확인받은 뒤 학교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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