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색연필
주말만 되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기 바빴던 우리 가족은 속절없이 퍼붓는 장대비에 갇혀 모처럼 집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일어나는 시간도 제각각이고 밥도 각자 알아서 차려 먹는 등 서로에게 일절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모두에게 진정으로 꿀 같은 휴식이었다.
아무도 깨어있지 않은 이른 시간부터 홀로 아침밥을 차려먹고 밀린 드라마를 정주행 하기 시작했다. 얼마 만에 가져보는 여유로운 아침이었던가...
하지만 드라마가 끝나자 이내 심심해지기 시작했다. 누구라도 깨워서 말을 걸어볼까 하던 차에 딸아이가 뒤늦게 일어나서 느릿느릿 아침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혼자 알아서 간식도 잘 챙겨 먹는 녀석이다. 냉장고에 있는 음식들을 꺼내서 직접 씻어서 먹기도 하고 에어프라이어에 돌려서 먹기도 한다.
열심히 먹어서 부쩍 키가 크기 시작한 꼬마의 관심사는 오직 음식, 노래, 춤뿐이다.
음... 이대로 시간만 흘러가게 놔둘 순 없다. 시간 있을 때 뭐라도 시켜야지... 주말 동안 각자 하고 싶은 걸 하자했지만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자 딸아이를 불렀다.
"오늘은 '공부'란 걸 해볼까? 문제집 좀 가지고 올래?"
"싫어. 오늘은 주말인데 왜 공부를 해?"
"평일에도 안 하잖아? 채점만 해줄게."
몸부림을 치며 버티던 녀석은 엄마의 등쌀에 마지못해 문제집을 가지고 왔다. 유난히 공부시키기 힘든 녀석이다. 공부보다 노는 것이 더 좋을 나이라며 실컷 놀아라 하던 것이 벌써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흐르고 어느덧 졸업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그동안 해놓은 것이 없으니 알게 모르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라도 정신 차리고 공부를 봐줘야겠다는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노는 것에 최적화되어 있는 딸아이를 붙들고 있는 것은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두 여자는 거실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마지못해 녀석이 가지고 온 것은 지난 1학기 과학 문제집이었다. 예습을 하고 가도 모자랄 판에 한없이 밀려버린 분량은 처치 곤란이었지만 녀석의 속도에 맞춰서 천천히 가기로 했다. 어찌 보면 요 녀석에겐 복습이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어디 보자... 2단원을 다 풀어놓으라고 했는데..."
책장을 스르르 넘기며 대충 훑어보는데 그래도 문제를 풀어놓은 흔적이 보였다. 별 기대 없이 채점을 하기 시작했다.
"어? 이상하다? 왜 다 맞지? 이럴 수가 있나?"
연신 동그라미가 그려지는 딸아이의 문제집을 보며 놀라움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학원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집에서 꾸준히 공부를 해왔던 것도 아니어서 당연히 장대비가 내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녀석의 공부를 봐주는 것이 힘들었고, 그동안 회피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번 단원은 좀 쉽더라고. 학교에서 했던 실험도 재밌었고..."
눈이 똥그래져서 채점을 하는 내 표정이 재밌었는지 녀석의 얼굴도 환해졌다. 그동안 학교에서 수행평가를 잘 봤다고 자랑할 때마다 형식적으로 칭찬해주기만 했는데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수행평가 점수는 눈으로 볼 수 없어 아이의 말에만 의존해서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성적표에 '잘함'이 쏟아져도 초등학교 때는 다 그 정도는 받는 거지 라며 안일하게 생각했었다.
"OO는 수업시간에 누구보다 바른 자세로 앉아서 열심히 설명을 들어요. 혼자 꼿꼿하게 앉아있어서 OO의 눈을 바라보며 설명할 때가 많아요."
문득 작년 담임선생님이 해주셨던 말이 떠올랐다. 해줄 말이 없어서 자세 가지고 칭찬해 주신다고만 여겼었다. 설명까지 잘 듣고 있을 줄이야... 그동안 힘들다고 봐주지 않았던 것이 굉장히 미안해졌다.
"아이참... 엄마 이건 그렇게 쓰는 게 아니야."
한참을 신나서 채점하고 있다가 심이 다 닳아서 무심결에 실을 잡아당기고 색연필을 까고 있는데 녀석이 색연필을 뺏어갔다.
"이건 또 뭐야? 왜 여기에다 테이프를 붙였어?"
그제야 색연필에 칭칭 감아진 테이프를 발견하고 또다시 잔소리를 하려고 자세를 잡았다.
녀석은 테이프로 이것저것 쓸데없는 것을 많이 만든다. 어릴 때는 종이로 슬리퍼를 만들어서 신고 다녔었다. 그런 건 어떻게 생각해 내는지 신기하기도 했지만 자원 낭비라고 생각해서 곱게 보지 않았다.
"이건 실을 고정하려고 내가 만든 거야. 이거 봐봐."
돌돌 감겨있던 종이링을 빼서 다시 끼우며 덜렁이는 실을 고정했다.
"와~~ 이게 그런 용도였어?"
새어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대체 너의 머릿속엔 뭐가 들어 있을까? 웃음소리에 남편도 나와서 보고는 어린 시절 본인이 했던 것을 똑같이 하고 있다며 감탄했다.
그럼 그렇지... 핏줄이 어디 갈꼬...
"아니, 근데 이건 뭐야?"
신나서 채점하던 중 내 눈동자가 유독 한 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슬며시 고개를 들어 흘겨보는 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은 멋쩍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이거 정말 잘 쓰지 않았어? 내가 또 기발한 생각이 나서 적어봤지... 어, 엄마? 화난 거 아니지?"
하... 이걸 맞았다고 해야 할지 틀렸다고 해야 할지 고민되는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위 (가)와 (나)처럼 우리 생활에서 온도가 다른 두 물질이 접촉하여 열이 이동하는 예를 한 가지 쓰시오.
-> 우리 엄마는 화가 나면 몸에 열이 많아지는데 우리가 "죄송합니다 " 하면 좀 열이 공기 중으로 없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