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준비가 되었을 때
"이건 비밀인데... 사실 너 되게 똑똑해..."
"뭐~~ 어?!"
"놀랐지? 네가 공부를 안 해서 그런 거지 맘먹고 하잖아? 그럼 100점 받는 건 우스울걸?"
딸아이가 웃는다. 엄마의 농담에 어이가 없어서!
"우리 꼬마가 타고난 머리가 얼마나 좋은데... 공부를 안 해서 그런 거뿐이야..."
딸에게 늘 하는 말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릴 수도 있다. 전부 다 맞을 수도 있고 다 틀릴 수도 있다.
녀석은 아직 긁지 않은 복권이니까.
아이들에게 억지로 공부를 시키지는 않는다.
원치 않는 것을 억지로 했을 때 오는 후폭풍이 어떤 것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대신 어릴 때부터 학습지처럼 하루 한 장씩 문제집을 풀게 했었다.
일명 10분 수학!
하지만 이 역시 통하는 아이가 있고 그렇지 않은 아이가 있다. 나의 꼬꼬마는 엉덩이가 솜털처럼 가볍고 문제집을 푸는 것보다 세상을 관찰하는 것이 더 즐거운 아이였다.
행복이 우선이기에 섣불리 시도했던 '10분 수학 시간'은 조용히 사라졌다. 하지만 무작정 손 놓고 있기엔 뭔가 아쉽기도 했고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엄마로서 그냥 놀리자니 최선을 다 하지 않은 것 같고, 신경을 써서 봐주자 하면 항상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야."라고 무심코 던진 말을 찰떡같이 소화하고 있는 딸에게 무슨 미련이 남아 서있까...
돌아오는 새 학기마다 풀지도 않는 문제집을 사주는 것은 어쩌면 나를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뭐라도 해줬다는 생각으로 위안삼을 테니까.
그렇게 현실을 외면한 채 살아왔다.
퇴근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오늘 학교에서 수학시험을 봤는데 반평균이 82점이야. 근데 내가 몇 점 받았는지 알아?"
"몰라. 몇 점 받았는데?"
"그건~~~ 엄마가 집에 오면 알려줄게. 히힛~!"
"왜에~~ 그냥 지금 말해주면 안 돼? 지난번 보다 더 떨어졌어?"
말해놓고 속으로 퉤 퉤 퉤! 를 외쳤다. 지난번보다 더 떨어졌다면 작정하고 수학학원을 알아봐야 한다.
"글쎄~~ 몇 점일까? 그러니까 빨리 집으로 와~"
딸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점수가 크게 궁금하지 않았다. 녀석의 점수는 늘 비슷한 그 언저리에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 곧 내게도 스트레스가 되기에 시험성적 가지고는 크게 뭐라 하지 않는다.
"괜찮아. 다음에 잘 보면 되지 뭐."라고 쿨하게 넘어가면서 현재 아이들의 레벨이 어느 정도 되는지 테스트하는 정도로만 여겨왔다. 사실 이 나이 때 시험성적이 미래를 좌지우지할 만큼 중요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엄마~~~ 여기 와서 앉아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서자 딸아이가 나를 식탁으로 앉혔다.
후다닥 방으로 달려가서 시험지를 가지고 왔다. 녀석이 자신 있게 내려놓은 시험지에는 빨간색 색연필로 95라고 숫자가 커다랗게 적혀있었다.
"엄마야! 이게 뭐야?"
눈이 침침해서 잘못 본 게 아닐까 하고 다시 들여다봤다. 시험지에 적혀있는 숫자는 어김없이 '95'였다.
"어머어머! 장하다 우리 딸~! 잘했어!"
기쁜 마음에 딸아이를 와락 안아주었다. 궁디팡팡 해주며 아낌없이 칭찬해 줬다.
"이거는 고쳐서 틀린 거야. 이거만 안 고쳤으면 100점 받을 수 있었는데 너무 아까운 거 있지."
엄마의 폭풍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녀석은 쫑알쫑알 수다를 이어갔다.
"잘했어~~ 엄마한텐 이게 100점보다 더 큰데? 뭐 먹고 싶어? 먹고 싶은 거 다 사줄게."
"치킨! 치킨 먹고 싶어!"
녀석이 먹고 싶다는 바삭한 치킨을 바로 주문했다.
'그런데 평균이 82점이면 전반적으로 문제가 쉬웠다는 건데...'
에잇! 그것이 뭐가 중요한가. 평균 이상으로 받아 왔다는 것이 중요하지.
그날 저녁 딸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치킨을 먹었다.
딸과 함께 공부를 시작한 지 벌써 3주 차가 되었다.
녀석은 매일 연산 한쪽, 영어 한쪽(단어와 문장 3-4개 외우기), 나머지 과목들은 돌아가면서 한 장씩 문제를 풀어온다.
도합 딱 2장. 최근 우리가 만든 새로운 공부 규칙이다.
문제수도 많지 않아서 마음만 먹으면 공부를 끝내는데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채점시간도 길지 않아 서로에게 부담이 없다.
아직까지 녀석은 착실하게 그날의 공부를 잘해오고 있다. 언젠가는 스스로 한쪽을 더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이 자라나겠지.
나는 오늘도 그 작은 변화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