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을 맞춘 것도 아닌데 저절로 눈이 떠졌다.누구보다 노는 것에 진심이다. 오랜만에 떠나는 나들이가 내심 기다려졌나 보다. 부지런히 도시락을 준비하고 온 가족이 새벽부터 길을 나섰다.
아침 9시에 오픈하는 시간에 맞춰서 먼 길을 달려갔다. 미리 챙겨 온 삶은 달걀로 아침을 대신했다. 아침공기가 달다.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도 새롭게 보인다.
라떼는 말이야..
기차 타고 여행 가면 카트를 끌고 다니던 아저씨가 계셨지. 꼭 삶은 달걀과 사이다를 사 먹었어. 주황색 그물망에 담긴 귤도 빼먹지 않지. 식탐이 많은 친척오빠가 아저씨를 발견할까 봐.. 앞칸에서 카트가 넘어오는 소리가 들리면 외숙모가 바닥에 뭐 떨어졌다고 오빠들 보고 찾으라고 했대. 그런데 그게 통할리 없잖아? 아저씨가 큰소리로 외치면서 오는데.. 뭐라고 말했더라...
모처럼 봄나들이에 설렘 가득한 나는 가는 내내 말이 끊이지 않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풍경들이 하나둘씩 바뀌기 시작했다. 좁다랗게 난 길을 굽이굽이 들어갔다.정확히 9시에 맞춰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바깥공기는 상쾌했다. 시원한 봄바람이 맞이해 준다. 장시간 차에 있어서 찌뿌둥한 몸을 기지개로 깨웠다. 아직 몸이 덜 풀린 아이들과 미리 준비해 온 티켓을 보여주고 입장했다.
"청남대가 뭐 하는 곳이에요?"
아이들에게 생소한 대통령별장에 왔다. 이 근처를 지나가다가 이정표에서 발견하고 언젠가 와봐야지 한 것이 바로 오늘이다. 때마침 벚꽃이 만개한 요즘 꽃구경도 함께 할 수 있다. 대통령의 별장을 둘러보는 것이 목적인데 녀석들은 꽃구경에 꽂혔다. 대체 꽃은 왜 보러 오냐고 투덜댔다.
안으로 들어가니 파란 호수가 제일 먼저 반겨주었다. 풍경에 반해 사색에 잠길 여유가 없다. 녀석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바로 앞에 있는 별관부터 관람했다.
역대 대통령들의 포스터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아들은 나름 관심을 갖고 둘러보기 시작했다. 청남대를 소개하는 짧은 영상도 보고, 대통령들이 사용했던 물건들을 전시해 놓은 것도 유심히 관찰했다. 시대가 흐를수록 전시품목이 달라지는 것이 인상 깊었다.
밖에서는 무료로 가훈을 써주는 이벤트를 했다. 가훈이 없던 우린 즉석에서 급하게 지어서 요청했다. 아저씨께서 한 획, 한 획 정성스레 써주셨다. 붓글씨 쓰는 것을 처음 봤을 아이들에게도 좋은 경험이 됐으리라..
본관에서는 당시 사용했던 집무실, 침실, 식당등을 볼 수 있었다. 노란색 장판이 유난히 눈에 띄었던 이곳은 여전히 시간이 멈추어 있다. 아이들은 쉽게 공감할 수 없는 TV와 가구들이 친숙했다.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이다. 그렇기에 눈길이 계속 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이정표를 따라 정원을 거닐면서 봄날의 햇살을 만끽했다. 벚꽃이 만개한 산책길에 아침햇살이 드리웠다. 만화에서나 볼법한 작은 숲 속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시원한 분수가 뿜어져 나오는 양식어장에서는 때마침 음악분수쇼가 진행되고 있었다.
ABBA - Dancing Queen
좋아하는 팝송에 맞춰 시원하게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를 보고 있자니 내 마음도 덩달아 춤추기 시작했다.
어느새 이곳을 즐기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활짝 웃는 아들의 얼굴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다. 녀석들이 물고기를 불러보겠다며 물고기밥을 주는 시늉을 했다. 물고기가 튀어 오르기엔 거리가 너무 멀지 않니..? 오랜만에 보여주는 엉뚱함이 반가웠다.
요즘 들어 비밀이 많아지고, 부쩍 신경질적이 돼버린 아들의 또 다른 자아는 잠시 사라졌다.
화창한 날씨 때문인지.. 앞으로 마실 녹차라테 때문인지.. 사진 찍을 때도 도망가지 않고 잘 서있어 줬다. 이런 평화로운 시간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힘들지만 먼 곳까지 나온 보람이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하루였다.
돌아가는 길에 꽉 막힌 교통체증만 제외한다면..
"꽃이 왜 좋아?"
아이들이 내게 물었다.
"응? 꽃이 왜 좋냐고?"
흠... 글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으니까? 예쁘니까! 나도 잘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꽃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행복했다. 혼탁했던 기분이 정화되는 것 같았고, 꽃의 싱싱함이 탐스러웠다. 내가 갖지 못하는 젊음을 보고 있는 것이 좋았다.
바로 그때, 윙윙~~ 거리는 소리가 뒤통수에서 커다랗게 들려왔다.
"엄마야~~~~~!!"
나도 모르게 용수철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커다란 말벌이 내 머리카락에 앉았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손가락만 한 크기의 엄청 큰 말벌이었다.혹시 쏘인 건 아닐까 걱정부터 앞선다. 아니겠지.. 벌은 침을 쏘면 죽는다면서.. 아들이 말벌은 여러 번 침을 쏠 수 있다고 했다.
하~~~~~~ 그 말을 들으니 온몸의 신경세포가 또다시 곤두서기 시작했다.
벌을 유난히 무서워하는 딸아이에게 늘 '가만히 있으면 벌은 헤치지 않아.'라고 얘기하던 나와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이렇게 큰 말벌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그래, 빨리 이곳을 벗어나자. 꽃사진이고 뭐고 차로 단숨에 줄행랑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