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주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처음 여행을 떠나 왔을 때 맞이했던 아침은 몸이 상당히 가볍고 마음이 싱그러웠다. 한껏 여유로움을 만끽했던 아침시간은 여행의 피로가 쌓이면서 점차 줄어들어 갔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서 천장을 응시했다. 지난 여행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굉장히 많은 일들을 겪은 거 같은데 벌써 먼 옛날얘기가 되어 희미해져가고 있는 것만 같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아직 나는 런던에 있는데 벌써 추억속에가둬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마지막 남은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오늘을 위해 아껴두었던 컵라면을 꺼내 들었다. 이걸 먹으면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라면 한 젓가락에 수많은 감정들이 요동쳤다. 힘을 내어 마지막 하루를 잘 지내보자.
Sunday morning in London
일요일 아침, 한 주를 마감하는 시간이다. 어쩌다 보니 내겐 여행을 마무리하는 시간이 되었다.
이른 아침 튜브 안은 한산했다. 런던에서 생활할 당시 출근 시간이면 어김없이 사람들로 꽉꽉 차있었다. 작고 좁은 튜브에는 덩치 큰 사람들이 콩나물처럼 빼곡히 안을 채웠었다.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출근길의 풍경은 비슷했다. 놀랍도록 신기했던 것은 사람들이 앉는 좌석 통로 쪽은 비워둔다는 것이다. 좁디좁은 통로 안까지 빡빡하게 메워서 다니는 우리의 지하철 풍경과는 달랐다.
모처럼 지하철 여행에 푹 빠져 있을 때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Liverpool Street
예전에 딱 한번 하우스 메이트들과 분위기 좋은 곳이 있다고 해서 가봤었다. 바닥에 소파와 방석이 있어 자유롭게 앉을 수 있고, 둥근 테이블 위에는 초가 켜져 있는 아늑한 분위기의 술집이었다. 가본 적은 없지만 모로코풍의 인테리어와 몽환적인 음악에 맞춰서 자유롭게 춤추는 사람들.. 리버풀 스트리트 하면 생각나는 단 하나의 추억이다.
오늘은 전혀 다른 분위기인 마켓에 가 볼 생각이다. 도시에 있지만 조금 더 도시다운 풍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낮의 풍경은 생경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건물 유리창이 맑은 광택을 자랑하고 있다.
'이런 곳이 있었구나.. 왜 몰랐을까?'
내가 살던 곳은 2 존 북동쪽 끝자락에 있는 조용한 동네였다. 낮은 건물들이 대부분이며 주택단지가 띄엄띄엄 규칙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황금빛 햇살이 내리쬘 무렵 선선한 가을바람맞으며 장을 보러 갔던 대형마트 Sainsbury's가 생각났다. 넓은 규모의 주차장과 단층으로 된 오렌지색의 큰 건물이 전부였던 마트는 전형적인 외곽지역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대비되는 도시의 모습을 감상하며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마켓 중 하나인'스피탈필즈 마켓(Spitalfields Market)'으로 향했다.통유리 천장으로부터 채광이 잘 들어오는 실내에는 각 종 물건들이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었다. 빈티지한 옷들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는데 생각보다 저렴하진 않았다.
이제 막 문을 연 상점 주인들은 분주히 진열상품을 정리하며 손님 맞을 준비에 정신없어 보였다. 슬며시 그곳을 빠져나온 나의 발걸음은 바로 옆에 있는 '선데이업 마켓(Upmarket Brick Lane Food Hall)'을 통과해 '브릭레인(Brick Ln)'으로 옮겨졌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벽에는 화려한 문양과 색감의 그라피티가 그려져 있었다. 어디선가 인도 음악이 들려왔다. 한 아저씨가 주전자에 향긋한 짜이를 팔팔 끓이고 있었다.하지만 눈앞의 광경이 더 이상 새롭지 않았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앞뒤로 지나치는 사람들에 뒤섞여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다들 목적지가 분명한 사람들처럼 거리를 걷고 있는데 나는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린 것처럼 멍해있었다.
흥미를 잃어버린 나의 시선은 짜이를 컵에 따르고 있는 아저씨의 손끝에도, 혹여나 뱅크시의 작품이 숨어 있을지도 모를 그라피티에도 머무르지 못했다.
애꿎은 핸드폰만 만지작 거리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 Lucy에게 전화를 걸었다.
Sunday afternoon in Brighton
잠에서 깨어나 문득 차창밖을 바라보니 아름다운 성이 보였다. 감성에 젖어 풍경을 바라봤다.
'이 나라 성이 참 많구나.. 다 비슷하게도 생겼네.'
전에 없던 경관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때쯤 기차가 돌며 성 뒤로 숨어있던 성당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 아래로 익숙한 마을이 시야에 들어왔다.
OH, MY GOOOOD!!!!
내가 본 것은 얼마 전에 다녀온 '아룬델성'이었다. 깜박 잠든 사이 내려야 할 곳을 놓친 것인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길이 없었다. 속절없이 계속해서 달리던 기차는 'Littlehampton'에 도착했고 이어서 잠시 정차한 뒤 브라이튼으로 가겠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언니~ 그러지 말고 브라이튼으로 와요. 거기 아무도 없는데 혼자서 뭐 해..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요."
수화기 너머로 Lucy의 달콤한 유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몰려드는 인파에 벽화조차 쉽게 볼 수 없었다. 오늘 당장 요리를 해 먹을 일이 없는 내게 신선한 야채와 과일이 눈에 들어 올 리 만무했다. 내가 서 있는 곳에 대한 미련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순간 쏜살같이 리버풀역으로 달려갔다.
왕복 £23
며칠 전 브라이튼에서 런던으로 오는 기차표를 5.55파운드에 구매했었다. 저 금액이면 2번을 왕복하고도 남는 돈이다. 잠시 망설여졌다. 아직 주머니에는 300파운드가 들어있다. 여행경비를 다 쓰지 말고 남겨서 가자 했었다.
에잇! 모르겠다. 그냥 가자!
일단 티켓을 구매했다. 200파운드만 남겨가지 뭐.. 하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출발시간까지 기다리는 동안 가까운 은행을 찾았다.
Lloyds Bank
주거래 은행이었지. 예전에 한 한국인 오빠가 새로 온 학생들마다 불러서 저 은행으로 데리고 갔었어. 모두가 그의 친절함에 감동받았었지. 나중에 알았어. 신규고객을 소개해줄 때마다 수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뭐 신규로 가입만 해도 소정의 이벤트머니를 넣어줬으니 윈윈이긴 했지. 다들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일을 나서서 하는 사람이 없었어. 초면인 사람에게 쉽게 다가가서 말을 걸고 도움을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 참 고마운 사람이었어.
반갑게 스쳐 지나간 옛일들을 뒤로하고 친구에게 받은 20파운드짜리 옛날 화폐를 내밀었다. 은행직원은 친절하게 신권으로 바꿔줬다. 50펜스의 수수료를내고 받아 든 지폐를 야무지게 챙겼다.
1시간이면 도착할 거리를 2시간이나 걸려서 역에 도착했다. 역 앞에 Lucy가 마중 나와 있었다. 바로 어제 하루종일 함께 보냈는데 오늘 또 보니 새롭게 반가웠다.
이미많은 시간을 철길에 버리고 온지라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던 우린 브라이튼 거리를 헤집고 다니며 옛 추억을 나눴다.
며칠 전 홀로 왔을 때 느꼈던 쓸쓸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분명 같은 공간인데 오늘 나는 행복하다.
바로 이 느낌이었어!!
이제야 진짜 브라이튼에 온 기분이 들었다.
Lucy는 새로 생긴 뷔페가 있다며 그곳으로 데려갔다. 어두운 배경에 은은한 조명이 빛을 밝혔다. 뭔가 고급레스토랑 같은 분위기가 낯설었다.
'브라이튼에 이런 곳이 있다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내가 재밌다는 듯 Lucy가 웃어 보였다.
"언니.. 내가 말했잖아요. 한국이랑 똑같은 뷔페가 생겼다고. 오늘 배 터지게 먹어보자고요."
두 여자는 별일 아닌 것에도 까르르 웃어대며 음식을 담기 시작했다. 드라이아이스 사이로 탱글한 회가 먹음직스럽게 담겨있었다. 코너별로 푸짐하게 올려진 음식 메뉴가 정말 익숙했다.
그동안 잘 챙겨 먹지 못하고 다닌 것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랄까.. 모처럼 친숙한 음식에 두 여자는 배가 땡그레질 때까지 만찬을 즐겼다.
Sunday night in London
만남이 있으면 반드시 이별이 찾아온다.
우리의 이별은 슬프지 않다. 오늘이 마지막이 아닐 걸 알기에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쉽다. 언제나 긍정적이고 밝은 아이는 애써 해맑게 웃어 보이며 손을 흔들어 줬다.
예기치 않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작별을 했다.
오늘 여기 불쑥 찾아온 것처럼 언젠가 또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날까? 헛헛한 마음을 억누르며 런던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고!'
레일에 문제가 생겨서 모든 열차가 빙글빙글 돌아서 가야 한다고 한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2시간에 걸쳐서 기차여행을 해야만 했다.
하...
마지막까지 이런 이벤트를 겪은 것을 행운이라 할 수 있을까? 뭐든 쉽게 흘러가면 편하긴 하겠지만 재미는 없겠지.. 어둑해진 창밖을 열심히 바라보며 두 눈에 꾹꾹 눌러 담았다.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고대하며..
9:30 pm
이제 마지막 선택이 남았다. 숙소에 들어가서 두 발 뻗고 잘 것인지 아니면 남은 시간을 조금 더 즐길 것인지.
밤늦게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여행지에서 홀로 다녀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안전제일주의자다.
그래.. 시간도 많이 늦었고 지하철이 끊기면 곤란하니까 그만 들어가... 긴 어딜 가? 런던에서 마지막 밤을 그냥 보낼 거야?
넘치도록 먹어치운 음식들을 소화시키느라 모든 신경이 위장에 아직도 머무르고 있는 사이 쉬고 있던 뇌신경은 나를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로 이동시켰다.
어느덧 4월이 된 봄밤의 공기가 제법 포근해졌다.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이 화려한 조명에 반사되어 일렁이고 있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밤의 경치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제 진짜 끝이구나...
일주일의 마지막 쉬는 날인 일요일을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으로 가득 채웠다. 지구 반대편을 홀로 누비고 다녔던 비현실적인 여행의 끝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지금의 여유는 누릴 수 없는 사치가 되겠지만 아름답게 빛나는 런던의 야경이 내 삶 속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을 켜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