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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닝닝하고 밍밍한 Mar 08. 2020

엽편소설- 어떤 연애

 



  그날은 잔치라도 하듯 온통 하얗게 눈이 왔었다.
  아무렇지도 않다가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대문 밖을 나가 발자국을 만들었다. 참 오랜만이었다. 그냥 별나게 감흥이 생긴 것도 아니었지만 이곳저곳 전화를 해서 오랜만에 중얼중얼 말들을 쏟아놓은 것 같다. 전화를 아니 안부조차 잘 묻지 않던, 안부 뒤에 숨어 있는 말조차 들키고 싶어 하지 않던 내가 이리 저리로 전화를 걸어 사람들을 당황케 만들었던 모양이었다. 뭔가 일탈을 꿈꾸고 싶어 하는 K는 며칠째 답답하게 집에 있다고 했고, 몇 번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 Y는 아마 술에 취해있을 것이고, 일에 지쳐 돌아온 L은 샤워를 마치고 잠자리에 든다고 했다. 내게 눈 소식을 전한 J는 우산을 쓰고 혼자 그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라 했고, 눈이 오지 않은 곳에 머물고 있던 O는 돌아올 것을 걱정했다.   


  이런 날이면 하루 종일이라도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걷다가 걷다가 어떤 누군가를 마주친다고 해도 꼬부장하게 바라보았던 모든 것들에도 희미하게 웃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스물한두 살 무렵 대학 축제 때 내가 공연을 막 마치고 내려서는데 내게 불쑥 쪽지를 건네던 K 선배가 있었다. 니 노랫소리 때문에 행복했다고. 언제나 볼이 불그죽죽했던 선밴데, 그날따라 눈까지 빨게 보였다. 그러던 그 남자가 다른 여자 옆에서 나를 없는 사람 취급했을 때, 그와 나는 사귀지 않았지만 나는 그의 뜨거움에 고개를 갸웃댔던 적이 있다. 나는 그런 수상쩍은 뜨거움을 믿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뜨거울 수 있는 사람이었던 거다. 속으로 뜨겁게 뒤집었던 시간을 열어 보았을 땐 이미 쉬어 쿰쿰한 냄새가 났고, 그 열을 겨우 비우고 나서야 나는 제정신을 차렸고, 그때에는 말라가는 일 밖에 남질 않았더랬다. 눈을 밟고 돌아오는 길은 발이 푹푹 젖어 말라가는 일이 오히려 낫겠다 싶었다. 번호 키를 누르고 아파트에 들어서는데 마침 그때 핸드폰이 울린다.

  “잘 있었니?

  “......”

  “잘 있었냐고. 여전하구나 그 버릇. 넌 어째 십 년이 지나도 똑같니.”

  성우 선배였다. 낯선 소리에 입을 다무는 버릇. 선배는 유일하게 그걸 알아차리는 사람이었다. 잊을 만하면 가끔 이렇게 전화를 하니 더더욱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선배구나. 잘 지냈어요?”

  선배의 소식은 늘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들었다. 그가 내 친구와 사귄다는 이야기도, 헤어졌다는 이야기도, 또 다른 내 지인과 만났다 헤어졌다는 이야기도, 그가 결혼 비슷한 것을 했다는 이야기도. 이상하게 선배는 나 빼고 내 주위에 있는 여자들과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했더랬다.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지만 선배는 유난히 액션이 컸고 탁월한 말솜씨로 여자들을 쥐락펴락했던 모양이다. 소문에 워낙 느린 나에게도 그런 이야기들이 들릴 때 즈음엔 선배는 쿨하게 나에게 전화를 걸어 생각보다 걔 재미없더라, 하는 식이었다. 정작 방부제를 품고 있는 것처럼 안단테적으로 천천히 썩고 있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재미 운운하는 선배의 삶은 오로지 누군가를 향해 늘 뜨겁게 예열된 듯 보였다.

  “다 지운 줄 알았더니 니 전화번호가 아직 남아 있더라고.”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선배가 결혼 비슷한 걸 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4년 만인가 그랬다. 변하지 않은 건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선배는 단 한 번도 나에게 직접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다. 뭐뭐 한 김에, 뭐 때문에, 뭐가 필요해서, 누가 물어봐서 늘 이런 식이었다. 그랬던 선배가 언젠가 나에게 딱 한번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적이 있다. 연애에 무심했던 내가 누군가와 막 시작하려고 했을 때 술에 잔뜩 취해 정말이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너 참 재미없다, 그랬던 것 같다. 그러곤 그다음 날 선배는 이런 문자 메시지를 남겼다. 어젯밤엔 좀 취했다. 미안하다. 나는 정말이냐고 물어보는 선배에게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으므로 미안하다고 말하는 선배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겨울을 좋아하던 나를 기억하고 있었던지 선배는 이 겨울의 치렁거리는 바람, 맑고 찬 공기, 그 길 위에 선 산책들, 쌜쭉한 겨울비까지를 희미하게 또 애매하게 건네는 것이다. 선배의 열망들은 늘 누군가에게 집중되어 있고 의심은 늘 내 몫이었다.

  “결혼... 했다면서요?”

  “아니”

  아 그렇구나. 선배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아주 짧게 아니,라고만 답했다. 이내 사소한 몇 가지 얘기를 주고받고, 잘 지내라고 말했다. 그곳의 추위는 알 수 없지만.


  선배는 이상한 사람이다.

  늘 삐딱한 태도, 시니컬하게 내지르는 말, 그리고 논리적으로 거둬들이는 말, 뭣보다 너를 꿰뚫고 있다는 말, 그런 것들로 사람을 들썩이게 만든다. 남자처럼 애매하게 굴다가 결국 안녕, 다음에 연락하자 뭐 이런 식이다. 아마 선배의 청춘은 여권에 도장을 찍듯 모든 이력엔 누군가가 다녀간 흔적들로 가득할 것이다. 그러니 딱히 떼 내기도 곁에 두기도 뭣한, 닿을 듯 말 듯 하지만 한 번도 가 닿은 적 없는, 그래서 잘 잊히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안타깝게도 나는 그와 공정한 거래를 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사무실은 여전히 차가운 공기가 감돌았다. 편집장 똘아이가 무슨 일인지 완전히 휘어잡을 기세로 한바탕 휘어잡고 간 모양이다. 마감은 늘 서로를 어쩌지 못하다 찢어 죽이고 말려 죽일 기세로 다가오고 여기저기 픽픽 쓰러져 자거나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 투성이다. 그 속에서 커피를 마시며 발을 까딱까딱 거리며 일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지은 씨 뭐 좋은 일 있어?”

  “네?... 아뇨. 뭐...”

  애매하게 말하는 습관은 여전히 어쩌질 못하고. 새로 나올 책에 홍보용 글을 마무리하다가 문득 성우 선배가 떠올랐다. 연락이 왜 안 되니, 무슨 일 있니, 하고 물었던 선배는 늘 그다음 날 아님 그 그다음 날 다른 여자를 옆에 끼고 와 늘 나를 무안하게 만들었던 사람인지라 그냥 어제 그 전화도 선배 말대로 핸드폰을 뒤지다 우연히 전화한 거라고 정말로 그렇게 믿어버리게 만든다. 역시 그것도 재주다. 사각자의 눈금처럼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으면서도 띄엄띄엄 연락을 하는 선배에게 마치 단련이 된 것처럼 선배가 연락이 오는 날을 기다렸다는 듯이 거기에 맞게 내 기분도 널을 뛰는 것이다. 괜찮다, 괜찮지 않다, 그러는 것이다. 며칠을 뒤척이다 보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선배는 이제 가상의 인물처럼 내 머릿속에서 쿵쾅쿵쾅 거리다 총총... 하며 안녕을 고하는 것이다. 이제 익숙하다.   


  그렇다고 내가 연애를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언제나 예열되는 시간이 길다 나는. 또 충분히 예열된 순간에도 그 순간의 뜨거움 때문에 결국 식어야 되는 타이밍을 찾지 못하고 들들 볶이기만 한다. 뒤늦게 본 어느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남자에게 악착같고 악착같이 묻고 또 묻는데 내가 놓친 사랑들은 여전히 이유를 잘 모르겠다. 내가 이렇게 촉이 좋은 사람인데도. 그래서 나는 일찌감치 묻어두는 편을 택했고 혼자 오래오래 되뇌고 푹푹 썩어가고 뒤척이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그럴만했겠지, 라는 다소 촌스러운 결론을 내리고 만다. 하긴 나는 잊으면서도 잊히면서도 기다리고 기다렸던 사람인데 이유 따위 뭐가 대수라고. 나는 언제나 예열되는 시간이 긴 사람이고 게다 잘 식지 않는 사람이니 그것도 상대방의 동의 없이 혼자서, 오랫동안, 더럽게 질기게, 가장 모양새 빠지게 질척한 연애를 혼자서 감내하느라 대체로 나는 문드러졌었다. 결과적으로 아무래도 당신이 나를 차지하겠지, 라는 남자는 없었다는 것. 나는 늘 안전한 쪽으로만 다니니까. 그래서 나는 여전히 혼자고 서른하나씩이나 먹었고 성우 선배는 여전히 고구마 찔러보듯 들쑥날쑥 거리는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내 청춘을 관통했던 불온한 연애사에 편입될 염려는 없어 보이니 말이다. 그는 결코 나에게 오지 않을 것이므로.    

 

  사무실 출입구에서 전 과장님이 손짓한다.

  “이 봐 지은 씨. 밖에 누가 기다리는데?”

  “저... 요?”

  누구지. 누굴까. 스웨터 단추를 잠그고 늦은 걸음으로 나간다. 누구지 사무실까지...    

  “놀랬지?”

  빤히 쳐다본다. 성우 선배는 히죽 웃는다.

  “여긴... 어떻게 알고...”

  뭐 그거야 간단하다는 듯이 어깨를 한번 으쓱한다. 출판사를 옮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면 그의 정보력에 감탄해야 하는 건지 내 주변인들의 입이 가벼운 건지 아님 정말 놀래 주려고 저러는 건지 아님 정말 할 말이라도 있는 건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선배는 나에게 아무런 답도 주지 않을 거니까.

  “너 놀래라고. 재밌잖아. 불쑥. 이런 거”

  그래... 재밌지 몇 년 만에 불쑥. 또 오랫동안 그림자조차 보여주지 않은 채 소문으로만 떠돌다가 또 한참 만에 불쑥, 그러는 거. 주위에 많은 이들처럼 나도 선배를 좋아했지만 선배와 연인으로 엮이지 않았던 건 선배의 여자들처럼 끈덕지게 묻고 따지고 울고 소리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 마쳐?”

  “한 시간쯤...”

  “오케이. 나 요 앞 커피숍에서 죽치고 있을게. 천천히 마치고 건너와”

  미쳐 대답할 틈도 없이 휘리릭 계단을 타고 내려가 버린다. 대답도 듣지 않고, 아니 어떤 대답도 요구한 적 없는 선배에게 나는 또 한 번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또다시 예전의 성우 선배로 돌아와 있었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간다.

  창가 옆 자리, 성우 선배가 보인다. 무심한 듯 생각에 잠긴 모습. 사실 나는 선배의 그 어떤 말보다 저렇게 뭔가 생각에 깊게 잠겨 있는 모습이 좋았다. 처음부터. 선명한 눈썹, 하얀 피부, 앉아 있어도 큰 키, 마른 어깨, 긴 팔을 아무렇게나 포개고 앉아 있는 저런 모습. 나는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선배를 바라본다. 선배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어, 여기~”

  “오래 기다렸죠?

  “아니 뭐 책도 뒤적거리고... 지은, 저기 봐봐... 쟤들 웃기지?”

  창 너머 막 시작한 듯한 연인처럼 보이는 젊은 애들이 쭈뼛쭈뼛 거리며 서 있었다. 선배는 나를 그냥 지은, 이라고 불렀다.     

  “난 네가 아무것도 안 물어봐서 좋아. 그래서 쭉 좋았어. ”

  뭐라고 딱히 할 말이 없어서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게 웃는 것도 좋고.”

  “여긴 어떻게... 아니 왜... ”

  나는 어떻게 물어야 할지 몰라서 나도 모르게 횡설수설하고 있는 것이다. 선배 앞에만 있으면 이상하게 말을 더듬고 늘 저렇게 사춘기스러운 말줄임 속에 내 속내를 숨기게 된다.

  “어떻게... 왜...? 지은. 내가 어떻게 왔는지가 궁금한 거야, 왜 왔는지가 궁금한 거야?”

  “그야 뭐...”

  “넌 어째 아직 그 모양이냐. 그러니 연애를 못하지”

  “그건 아니에요.”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가 커졌다. 얘 봐라 하는 표정으로 성우 선배가 웃었다.

  “아, 그러셨어요? 연애는 좀 했나 보지? 언제? 누구랑?”

  “선배 빼고 다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런데 나는 왜 빼니? 너 이상하다.”

  “제가 그런 거 아닌데요...”

  귀엽다는 듯 피식, 웃는 선배. 긴 팔을 뻗어 어깨를 툭 친다.

  “가자. 밥 먹으러. ”

  “저는... 집에...”

  “너 인마, 말끝마다 동사는 어디 팔아먹고 왜 다 말줄임표야. 거기 뭐 숨겼어?”

  자기가 한 말이 웃기다는 듯 머리를 뒤로 젖히며 활짝 웃는다. 깨끗하고 긴 목이 유난히 눈부시다. 그래 선배의 저런 몸짓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던 그런 시절이 있었지. 시험기간 도서관에서 저녁이 다되도록 공부하다가 나오는데 저 앞에서 성우 선배가 책을 보며 계단에 기대 서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듯. 나는 살금살금 그 앞을 지나치는데, 너 밥 안 먹었지? 밥 먹을래? 그러는 거다. 그때도 쭈뼛쭈뼛 저는 집에서... 아, 그래? 그럼 밥 먹으러 가자, 하고 내 팔을 획 낚아채서 갔더랬지. 기다리던 누군가에게 바람이라도 맞은 걸까 생각했었다.  

   

  “너 전보다 살 좀 찐 거 같다?”

  “그... 래요?”

  나도 모르게 가슴부터 다리까지 쭉 훑어보며 그런가 싶었다. 워낙 살이 잘 안 찌는 체질이라 그리고 특별히 먹는 일엔 크게 의욕이 없는지라. 우리는 마냥 걷고 있었다. 어느 날처럼. 머리를 긁적긁적거리던 선배가 팔을 휘휘 돌리더니 내 어깨 위로 툭 하고 떨어트린다. 나는 내 어깨를 차마 내려다보지 못하고 점점 굳어갔다. 이상하다. 또다시 예전의 성우 선배로 돌아와 있었다. 더 이상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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