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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닝닝하고 밍밍한 Mar 11. 2021

원이에게

  오랜만이지?

  이 시간이면 아이를 재운다고 누워있다가 너도 같이 졸고 있을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밤 9시가 조금 넘었으니. 예전의 너는 밤을 꼴딱꼴딱 새우기도 잘하고 늦은 밤 늘 라디오를 켠 채 쿨럭쿨럭 하며 웃던 너인데. 밤 9시는 잠을 자기엔 우리에게 참 생경한 시간이었어 그렇지?  밤 잠이 많은 나와는 달리 밤이 되면 더욱 쌩쌩해지던 너인데, 어째 쌜쭉한 마음도 없이 잠을 청하기도 하니 새삼 놀라워. 니가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내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된 게. 나는 내가 엄마가 될 줄은 몰랐거든. 나는 니가 엄마가 될 줄도 몰랐고. 딱히 뭐가 되겠다고 깊게 생각한 적도 없지만 엄마는 왠지 나와 너랑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같았어. 긴 연애를 하면서도 나는 엄마가 되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별로 없었으니까. 유난히 무뚝뚝했던 너도 한 아이를 살뜰히 보살피고 기르는 일과는 다른 지나치게 마음을 쏟지 않아도 되는 사무적인 일을 할 거라 생각했거든.


  원아.

  나는 가끔 너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었어.

  1학년 첫 엠티를 갔을 때 과 동기에게 기대 울던 나를 못마땅해하던 니 모습이 기억나. 넌 나의 어떤 모습을 기대했을까. 내 약한 모습이 싫다고 말했었지. 나는 드디어 울음을 터트렸는데 말이야. 니가 좀 위로해 주지 그랬어. 내가 좀 기댈 수 있게. 유난히 단단하고 명랑했던 나를 참 많이 좋아해 줬었는데. 울고 있는 모습은 싫었구나. 그게 내가 너에게 처음으로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그 후로도 나는 너한테 기댈 수 없었잖아. 괜찮은 척만 했잖아. 그게 우리 사이에 알량한 긴장을 만들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그냥 툭, 쏟아내 버리면 그만인데. 왜 자꾸 다른 이들 얘기만 했지? 어떤 책, 어떤 음악, 어떤 작가 이런 얘기들이 다 무슨 소용이람. 그냥 울어버릴걸. 너한테 좀 매달릴걸. 많이 후회했어.


  너는 언제부턴가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나를 찍어줬어. 나는 너의 열렬한 피사체가 되었지. 잘 웃지도 못하는 나를, 엉거주춤한 나를, 나의 순간을 많이도 담아 주었지. 탐나는 대상은 아니었을 텐데 너는 나를 찍고 나는 너를 바라보는 시간들. 어색했던 시간들을 렌즈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그렇게도 다가갔어. 니가 찍어서 보내준 사진들- 물을 머금고 있는 풀들, 안개, 거미줄, 산, 바다-을 벽에 붙이고 오래 바라봤어. 색이 바래질 때까지. 그 순간들을 찍기 위해 몸을 숙이고, 또 찍고 찍었을 수십 장의 사진들을 바라보는 너를 종종 생각했어. 나는 니가 꼭 어디로 도망가는 것  같았어. 얼마나 발돋움해야 이곳에서 멀어질 수 있을까, 사진처럼 근사한 순간을 포착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 같았어.


  불안하고 초조했던 나는 더 이상 새침한 인상을 줬던 20대는 아니야. 어느새  안온하고 평범한 모습으로 그저 생활에 잠겨있어. 너도 삐딱하고 차가운 모습이 아니라 단순하게 그저 싱긋 웃는 사내아이의 엄마였어. 잘할 수 있는 것들이 거진 생각이 안 나는 너도 나도.


  원아.

  생각해보면 나는 한 번도 내 맨얼굴을 너에게 보여준 적이 없는 것 같아. 그게 가끔 미안해. 난 내 빈 곳을 니가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어. 그런 마음은 나누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거든. 막막한 상냥함으로 버텨왔는데, 평범하고 다정한 부모님을 둔 너를 보면 내가 너에게 잘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가끔 들었어. 농담처럼 굴면서 나는 아닌 척, 모른척했어. 삶이 안전한 이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나의 삐딱함을 숨기게 돼. 같은 부류가 되진 못하더라도 경계하지는 않게 말이야. 나는 언제나 가장 힘든 이야기 말고 다섯 손가락 안에도 들지 못하는 사소한 징징거림에 대해서만 말해왔으니까. 갈수록 농담이 대범해지고 뻔뻔해진다는 게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나다운 마음이었어.


  그렇지만 말하지 않는 것들을 묻지 않는 너의 인내심이 가끔 서운하기도 했어. 니가 물으면 어쩌면 말할 수도 있었는데. 무탈한 니가 느끼는 까닭 없는 외로움과 고립감을 나는 오래 눈여겨봐왔어. 그건 너를 더 단단하고 더 무탈한 사람으로 만들더구나. 나는 그런 식의 성장을 동경해왔어. 악착같이 성장을 거머쥐어야 하는 그런 고통, 그런 슬픔, 그런 경험들 말고.


  전화를 하면 될 텐데 했지만, 멀리서 보낸 소식 같은 이런 아련함이 좋아서 가끔 나는 나 혼자 너를 불러보고 너를 생각해. 목소리도 좋지만 들끓었던 순간들을 곰곰이 헤아려 보는 이 시간들이 참 좋고 나 다워.

  

  나는 보통으로 살고 있어. 나이가 든다는 건 각자 알아서 회복하는 일일 거야.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말이야. 모르고 싶었던 일들을 진짜로 모른 채 끝내기도 하고 어떤 일의 이유를 찾는 날도 줄어들지. 아무렴 어때, 괜찮아.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조금씩 긍정이 쌓이기도 해. 그렇게 보통으로 살아가고 있어. 나는 언제나 할 말이 많고 선명했던 니가 참 고마웠어. 익명 같던 나를 먼저 알은 채 해 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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