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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닝닝하고 밍밍한 Apr 28. 2022

다독임의 말들

  출간 후 내 시를 읽은 분들의 후기나 느낌을 전달받았을 때 시를 쓸 때보다 마음이 더 벅찰 때가 많았다. 

  시를 읽을 때마다 마음에 점이 하나 생기는 것 같다. 그것은 어떤 기분이기도 하고 분위기이기도 하고, 얼룩 이기도 미완성의 어떤 마음이기도 하다. 

  그렇게 서로의 마음이 가 닿을 때 점과 점으로 이어지고 선으로 연결되어 누군가의 마음에 여러 모양의 아름다운 윤곽이 되는 것 같다. 

  

  시집을 내고 생각지도 못한 말들과 연락들을 받았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처럼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고, 기어코 나는 '오랜만에 무엇인가 되어' 있었다.
 나를 아는 이들의 카테고리에는 시인이라는 말은 없었다. 별로 내뱉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나를 꽤 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혹은 내가 얼마나 생산적인 사람인지를 가늠해보는 이들에게 말이다. 

  대부분 축하의 말들이다. 
  내가 얼마나 오래 삽질을 했는지 대체로 그들은 몰랐으면 좋겠다. 
  나는 과정이 드러나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대학 때 참 존경했던 선생님께 졸업 후 연락을 거의 못 드렸는데도 불구하고 책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문득 들었다. 그냥 어린아이가 되어 숙제 검사를 받고 싶은 기분이랄까. 내가 잘했는지 아닌지 확인받고 싶은 마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선생이라는 역할은 뭔가 알 수 없는 기분일 때, 옳다는 말을 듣고 싶을 때 혹은 바로잡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때 거기 그대로 있는 사람인가 보다. 꾹. 확인 도장을 받기 위해 팔뚝을 내밀던 유년처럼. 


  오랜만에 마음 편안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대학에 갓 부임하여 인연을 맺은 제자가 훌륭한 시인으로 성장하여 시집을 전해왔습니다. 함께 보내 준 녹차를 마시며 <사라지는 윤곽들>을 읽었습니다. 조금씩 아껴 읽어 나가는 시간 내내 행복하였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짚어내는 정확한 단어들을 아름다운 운율 속에 잘 버무려 놓은 시편들은 독자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화자는 “버티는 삶에 대해선 내가 좀 알지”라며 담담하게 말합니다. 온몸을 흔드는 부끄러움에 잠시 시집을 내려놓았습니다. 근래 겪은 이상한 일들에서 생겨난 마음의 상처로 인해 허둥거리고 있는 제 자신을 생각합니다. “이렇게 밖에 살 수 없을까” 하면서도 “슬픔을 먹고 단단해”져 간 화자의 삶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이런저런 일들로 고통을 겪고 있는 많은 분들에게 우리 함께 단단해지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이런 글을 sns에 남겨두셨다.  

  몰랐는데, 이럴 땐 동기들끼리 소식이 아주 빠르다. 글이 올라왔다는 말을 듣고 아주 뛰어가서(?) 읽었다. 성장했다기엔 이미 나이가 많지만 선생님 눈엔 그리 보였나 보다. 단 몇 줄이라도 듣고 싶었던 말인데, 확인받은 느낌이다.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서 그래, 됐다 하는 생각. 
  책을 내고 오래 가라앉는 기분이었는데... 나를 향한 모든 것들이 이렇게 다정한데 나 혼자 한사코 부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지 말아야지 한다.




  시인이 풀어놓는 보따리에 슬픔의 줄기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고 어느 순간 '노련하고 서늘한' 슬픔들이 옆에 있음을 깨닫는다. 읽는 내내 가라앉았다.  

  입을 닫고("나는 오늘 말이 없다", 오늘), 귀를 환각 하고(이석), 통증으로 생을 증명("통증은 생을 이어 주는 유일한 것이었다", 지독한 위로)하는 "헤어진 곳에서 다시 헤어지"(파묘)는 과정. 그렇게 게워 내고 또 게워 내면 구원(이석)에 이를 수 있을까.  

  멀어지고, 침묵하며 언제나 슬픔의 종착역을 찾아 헤매지만 사라지는 것들, 얼룩덜룩 늙어가는 것들, 어릴 적 결핍을 채웠던 소소한 것들에 시인의 시선은 닿아있다. 그래서 멀어지고 침묵하겠다는 단단한 작가의 각오가 슬픔의 보따리와 함께 묶여있다.  

  작가의 다짐으로 읽히는 <기록에 관하여>. 작가가 주워 모은 무거운 탄식들을 기꺼이 들어주겠다고 '들어줄 귀'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참 이상하다. 이 서평을 읽는데 익숙한 아이디가 먼저 눈에 띄었다. 대학 때 친구가 항상 썼던 아이디. 아주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옛사랑의 전화번호나 생일처럼 갑자기 떠올랐다. 친구가 말도 없이 인터넷 서점에 서평을 올렸다. "이거 너잖아?"라고 말했더니, 어떻게 알았냐고 하더라. 작가의 삶과 작품을 분리해서 설명할 수 없는 이유를 절감했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읽으면서 좀 많이 슬펐다고, 겨울 쿨톤 같은 친구가 뜻밖의 말을 했다. 어쩌면 내가 널 많이 모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고도. 그래 우리는 서로를 모르지. 다 몰라도 끝까지 몰라도 괜찮다는 것을 지금껏 증명하고 살았으니까. 그런 것들이 고마운 일이다. 짐작만으로도 환해질 수 있다는 거.




여린 마음도 쌓이면 단단해질까?

까닭 없는 슬픔이란 없는듯하다.

어떠한 모습으로 불쑥 드러내더라고 담담하게 마주하며 맞서는 것.

작가님께서 감정을 다 녹여내 써 내려가신 덕분에 독자인 나는 오히려 덜 아리다.

새삼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되는 건 모순.

시를 읽는 내내 연상되고 상상 그 속에서 치유라는 단어를 느낀 건 행운. 


  저자 싸인본을 남기러 출판사에 들어갔다가 알게 된, 이 책의 첫 독자가 sns에 올려준 후기. 쓴 사람과 만든 사람 외에 내 책을 처음으로 본 사람. 처음이라는 말을 따뜻하게 장식해준 사람이다. 특히 '작가님께서 감정을 다 녹여내 써 내려가신 덕분에 독자인 나는 오히려 덜 아리다'라고 쓴 부분을 읽고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어떻게 알았지? 내 책을 읽고 어떤 분이 그러셨거든. 시인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대신 아파하는 사람 같아요,라고. 같은 결의 말이었다. 이 문장을 아주 오랫동안 기억할 것 같다.




  한 획 흐트러짐도 없이 삶의 무거움과 슬픔을 감당하는 바르고 고된 자세의 시들, 요즘 시가 아니라는 말을 오직 상찬의 뜻으로 쓸 수 있는 좋은 시집, 그러니 잘 보이는 자리에 있어주길 바라게 됩니다. 


  독립문예지에 시를 실으면서 인연을 맺게 된 편집장님께서 시집을 읽고 감사하게도 글을 남겨주셨다.

  사실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지만, 이런 다독임은 좀 더 근사한 방향으로 걷고 싶게 한다.

  용기와 방향을 잃을 때마다 수면 위로 떠올릴 말들.

  지금은 어쩐지 환하고 낯선 순간, 아니 어쩌면 묽고 어렴풋한 순간이다.

  어떻게 쓸 것인가.
  이 아름답고도 무서운 경계심을 늦추지 않아야겠다. 


  여러 후기들과 말을 전해 들으면서 하나의 텍스트로 많은 마음들이 파생되는구나, 싶다.

  내 손에서 이제 떠난 말들이 되었구나, 싶기도.

  잘 떠나보내주고 싶다.  


  축하한다고 지인이 꽃바구니를 보내줬다. 그 마음 때문이었을까. 시들어도 버리지 못하고, 저 혼자 말랐다.

  고마움은 저렇게도 박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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