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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닝닝하고 밍밍한 Sep 06. 2022

그가 태운 비닐하우스는 무엇일까.

 

  안 봐도 찝찝, 봐도 찝찝할 것 같은 영화들이 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이 내겐 그랬다. 대충의 윤곽은 알고 있었던 영화라 그냥 안 보고 넘어갔는데 오늘 문득 외출을 했다가 갑자기 눈에 들어오는 비닐 하우스. 그래 오늘이다. 오늘이 태움 하는 날이다.


  "나는 가끔 비닐하우스를 태워요... 나는 비닐 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어요. 들판에 버려진 낡은 비닐 마우스 하나를 골라 태우는 거예요...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게 할 수 있어요....

  쓸모없고 지저분해서 눈에 거슬리는 비닐 하우스들. 걔네들은 다 내가 태워주길 기다리는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그 불타는 비닐 하우스를 보면서 희열을 느끼는 거죠."


  

  버닝, 낡아 쓸모없어진 것들은 가차 없이 태워버리는.


 "생의 근본적 기분은 불안이다"라고 말한 하이데거의 말이 떠오른다. 더불어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라는 책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냉담한 인물들, 속물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우리 자리를 차지한다는 의미이다." 라고 했던 말도.


  종수와 해미의 삶은 존재하지 않아도 그만인 것처럼 그들의 초라한 내부는 버려진 비닐 하우스 같다. 누구라도 태워주기를,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깨끗하게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처럼. 처음부터 그들의 자리는 없었다. 그래서 불안하다. 눈에 거슬린다.


 "내가 요리를 좋아하는 건 내가 생각하고 원하는걸 내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 있어서. 그리고 더 좋은 것은 내가 그걸 먹어버린다는 거지. 인간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듯이. 난 나 자신을 위해서 제물을 만들고 내가 그걸 먹는 거야."

 "제물?"

 "제물은 말하자면... 그냥 메타포야"


  영화 버닝의 수많은 메타포 중 하나인 '비닐 하우스'의 단서는 위의 대화에서 명확해진다. 기꺼이 태울 수 있는, 불타는 비닐 하우스를 보며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자, 끊임없이 메타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자 말이다.

 

  벤이 태웠다는 비닐 하우스는 그런 종류의 메타포일 것이다. 천박하게 말하지 않아도 그저 모호하게 말해도 상관없는 사람들. 아무렇게나 버려진 비닐 하우스가 아니라 잘 꾸며진 집에 평온하고 느긋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사람.


  그가 서랍에 모아놓은 다소 난잡한 장식물처럼 모든 제물은 일종의 수단으로 대체로 천박한 욕망을 가졌기 때문에. 그리하여 그가 태운 비닐 하우스는 어느 곳에도 있고 또 어느 곳에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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