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닝닝하고 밍밍한 Jan 10. 2024

김소연_편향나무

편향나무




 한 번도 원한 적 없는 이 세계에서

  백년은 살아야겠지

  미치지 않고서 그럴 자신이 있겠니


  용기 라는 말을 자주 쓰는 자는 모두 비겁한 사람이 되었다

  내 생각을 나보다 더 잘 읽는 자는 모두 적이 되어 있었다

  아침마다 나는 고쳐 말하고만 싶었고


  작년의 감이 매달려 있는 사월의 감나무를

  빨랫줄을 꽉 물고 있는 빨래집게들을

  등에 난 흉터를

  아까 본 그 사람을

  거북이처럼 걷던 그 사람을


  거북이는 등이 있어서 다행이고

  같은 맥락에서

  거북이 등 뒤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다행이고


  배낭을 메고 내가 나를 거듭 떠났다

  나를 배웅하기 위하여 나는 또다시 어딘가로 떠났다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곳으로 가서


  얼굴을 버리고 돌아와 얌전하게

  생활을 거머쥐는 나에게로 벚꽃잎들이 달라붙을 때

  얇이 라는 말을 깊이 생각했다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가장 거대한 흉터라는 걸 알아챈다면

  진짜로 미칠 수 있겠니


_김소연, 『i에게』, 아침달 시집, 2018, p. 24-25



*

  사람은 자기 자신이 가장 가혹한 형벌이다. 이것을 감추기 위해서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혹은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곳으로 가서 살아본 적도 있다. 그렇지만 매번 나 자신에게 들킨다. 자기 자신이라는 거대한 세계, 거대한 흉터는 결국 남들과 나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 사실 자체가 슬프거나 아프지는 않다. 각자가 해결해야 하는 자기 자신이 분명히 존재한다. 배낭에 무엇을 넣을지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결국 누구나 버릴 수 없는 자기 자신 같은 배낭을 메고 거듭 떠났다가 돌아온다. 모두 비겁한 자가 되지 않기 위해.

매거진의 이전글 허연_24시 해장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