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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닝닝하고 밍밍한 Aug 14. 2019

사흘 낮, 사흘 밤

- 그 낮과 그 밤은 내 인생에서 괄호 같은 날들이었다.

  어쩌다 보니 나는 결혼 후 처음으로
사흘 낮, 사흘 밤을 혼자 있게 되었다.


  이 사실을 가까운 이 말고 나를 잘 모르는 누군가에게는 말하고 싶었다.

  남편은 일주일간 해외로, 아이들은 시댁 모임으로 강원도로 떠났다. 남편도, 아이들도 없는 이 빈 집에서 특별히 매일 해야 하는 루틴을 빼고는 나는 마냥 의식의 흐름으로 살고 있었다. 의식의 흐름, 참 좋아했는데. 쩝. 처음으로 나는 마음대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동안 잘 못 쉬었던 것을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 몰아 쉬는 것 같았다. 이제 나는 누워 있어도, 앉아 있어도, 서성대도, 아무렇게나 입고 있어도, 씻든 안 씻든, 먹든 안 먹든, 그 아무도 내 주위에 얼씬 대는 이가 없었다. 강아지 재재조차 더운지 하루 종일 쓰러져 자고 있다. 뭔가 먹으려고 뜯는 소리, 차리는 소리, 써는 소리에만 벌떡 일어나 눈을 말똥거린다. 잔망스러운 것.


하루 죙일 쓰러져 자는 것도, 먹는 것을 향한 너의 강렬한 눈빛도 다 너의 욕망.

  

  이상하게 남자 셋이 다 사라진 빈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 나는 우선 청소부터 시작했다. 드러눕는 게 아니라. 왜 그랬을까. 차근차근 사흘 낮, 사흘 밤을 어지럽히고 싶었을까? 그래, 것도 설레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어지럽혀 놓은 공간을 뒤치다꺼리하는 게 아니라 내가 흘린 작은 부스러기 같은 것들을 소소하게 치우는 것, 긴 머리카락을 조용히 손으로 줍는 일들은 살림을 살고 있는 내게 사치 같은 일이다. 어쨌든 나는 설거지와 세탁기 돌리기, 빨래 걷어서 정리하기, 청소기 돌리기, 물걸레질하기, 책과 옷가지들, 장난감들 제자리에 정리하기,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분리수거 하기 등등 되는 대로 청소를 시작했다.

  

  물론 사흘 뒤엔 예상대로 어지럽혀져 있었지만. 나 혼자서 어지럽히는 일은 아무리 어지럽혀도 나름 질서가 있었다. 세 남자가 껴들지 않는 이 공간은 말이다. 그들은 침대 밑이나 가구 아래에 몰래 양말을 감추거나 휴지를 던져 넣고, 장난감이나 책을 손에 잡히는 대로 보다가 시큰둥하게 벌려 놓는다. 먹고 난 아이스크림이나 과자 껍질 혹은 그 부산물인 과자 부스러기는 소파 틈 사이로 식탁 아래로 부스러져 있거나 처참하게 조각나 있기 마련이다. 개어 놓은 옷가지들은 왜 그렇게 밟고 다니거나 그 위에 앉아 버리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들은 정말로 몰라서 그러는 거다. 그래서 더 이상 화가 나지 않고 상황에 맞는 명령어와 지시어들을 적절히 사용해 최소한의 삶의 감각을 깨우쳐 주고 있는 중이다. 권유나 청유문으로는 도저히 그들을 감당할 수 없다(더 지저분한 꼴은 이미 반이상을 치운 상태라--)



그들의 흔적 : 저것은 정리일까 반항일까, 너는 거기 왜 짱 박혀 있니, 너는 왜 고아처럼 버려졌니.


  그들이 사라진 내내 내가 가장 좋았던 것은 '먹는 것'에서의 해방이다. 안 먹겠다는 소리가 절대 아니라 나만 먹어도 되고 진짜 안 먹어도 되고 마음대로 먹어도 되고 내키는 시간에 먹어치워도 된다는 소리다. '먹는'게 아니라 '먹어 치워도 되는' 그런 밥을 가끔 꿈꾼다. 내 성격상 것도 쉽지가 않지만. 결국 내 탓이기도 하고(문제는 내가 곧잘 밥을 한다는 것이다. 후아). 예전에 '풀리지 않는 우울, 밥'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일을 하든 안 하든, 밥은 '대체로' 여자 쪽인 경우가 많다. 꼭 그래야만 하는 것도 아니지만 밥을 휘두르는 것은 늘 여자들이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고(물론 브런치에서 봤던 몇몇 분들은 제외하고. 오해 없으시길. 많이 부럽다고요--) 일주일에 한두 번 하는 밥이라면 괜찮겠지만 매일 챙겨야 하는 밥은, 지금부터 평생 해야 하는 밥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가끔 진절머리가 나는 것이다. 밥하는 걸 힘들어하면서도 그렇다고 골 때리게 사 먹는 일엔 또 별 소질이 없다. 이건 엄마가 나에게 남겨준 알게 모르게 길들여진 습관 같은 거다. 나는 엄마처럼 십 년, 이십 년 꿋꿋하게 밥을 하며 살 수 있을까?(안타깝게도... 10년은 너끈히 해버렸다) 남편을 먹이고, 자식을 먹이고, 식어 버린 밥처럼 혼자서도 꿋꿋이 밥을 먹고, 아니 밥을 해 먹고살 수 있을까? 가끔은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길에 들어선 거 같다고, 결혼 전반기 내내 생각했더랬다.    

  무튼 사흘이라는 시간 동안 밥에서 조금 자유로우니 내 삶에 여백이 생기는 것 같았다. 늘 아이들과 남편과 먹던 밥을 내 의지대로 먹어 치웠다. 식탁에서 먹기도 하고 바닥에서 혹은 책상에서 영화를 보면서 먹기도 하고 끼니를 그냥 넘기기도 했다. 게다가 내 마음대로 아침엔 죽이나 떡을 먹기도 하고 점심엔 떡볶이나 순대, 라면 따위들을 먹기도 하고 커피숍에서 따끈한 아메리카노와 샌드위치로 아점을 먹기도 하고 저녁에는 굶거나 혼자서 치킨 한 마리를 다 뜯어먹기도 했고, 과자 부스러기를 지저분하게 흘리며 주워 먹기도 했다.


  또 씻는 건 어떤가. 내가 샤워하고 싶은 시간에 씻었다. 혼자 샤워실을 독차지하며 애들처럼 들락날락 거리며 시간을 팽팽 썼다. 평생 매일 머리를 감던 나인데(제왕절개로 애 낳고 난 뒤에도 바로 다음날 스스로 머리 감던 나인데!) 과감하게 하루를 떼어먹거나 다음날 저녁 무렵 머리를 감기도 하고 옷도 입었다가 벗었다가 마음대로 멋대로 걸치고 앉아 있다. 사람이 사회적 존재가 아니라면 어땠을까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나날이다. 여러모로 짐승처럼 굴었다는 게 맞다.


  비가 오는 밤엔 온 집안의 창문을 열었다. 비를 좋아하지 않지만 빗소리는 좋다. 젖지 않고도 젖는 소리를 듣는 것이, 빗방울이 무언가에 부딪히며 내는 사물의 소리가 좋았다. 나에게는 어떤 소리가 날까. 그 소리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 함부로 비에 젖지 않았다. 이런 날이면 한 번쯤은 비에 젖어도 좋겠구나 싶었다. 빗소리를 들으며 자는 날엔 꿈속에서도 비가 오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시간에 내리는 비는 잠시 일을 멈추게도 했다.

  

  아침에는 조금 늦게 일어나기도 했다. 그래 봤자 9시지만. 책을 읽다가도 졸리면 그 자리에 바로 누워 잤다. 등이 아프도록. 밥을 먹고 졸리면 그 역시 그대로 누웠다. 소가 따로 없었다. 아이들을 재우느라 애쓰지 않아도 되니 그 시간을 다른 에너지로 쓸 수 있었다.


  빨래 양도 줄었다. 대신 이불을 무진장 세탁기에 돌리고 있다. 볕 좋은 날은 금세 마른다. 이불을 빨면 기분이 좋다. 새로 빤 이불을 덮고 자는 것은 더더욱 좋다. 아이들과 남편이 돌아오기 전까지 이불을 모두 빨아 새 것으로 깔아 놓기 위해서 우리 집 세탁기는 쉼 없이 돌아갔다. 세탁기 소리만이 우리 집에 사람이 살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게 했다.


  엄청난 양을 자랑했던 일반 쓰레기, 재활용 쓰레기, 음식물 쓰레기도 90프로는 준 거 같다. 나는 의도치 않게 소식을 하고 미니멀을 구사하고 있었다. 웬일이니. 쓰는 거, 먹는 것들로부터 간소화된 삶이란 이런 거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자고 먹고 놀고 보고 쓰고 읽고 다 했는데도 시간이 한참이나 남았고 저녁 무렵이 되어도 나를 재촉하지 않아도 좋았다. 한참 아이들 밥 챙기고 씻기고 잠자리를 봐줘야 하는 7-10시 사이에 내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거나 좋아하는 영상을 실컷 받아 보기도 했다. 실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는 틈틈이 아이들과 통화도 했지만 절대 소리 지르거나 닦달하지 않았다. 자유를 맛 본 자의 여유랄까. 아이들이 유난히 상콤해 보였다.


  사흘 낮, 사흘 밤을 보내고 아이들이 돌아왔다. 영상 통화로 간간이 아이들은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나는 이제 앞으로 너희들을 더 많이 사랑할 거라 맘먹었다. 물론 목청을 높이는 날들도 있겠지만, 그것은 순탄한 유년기의 변변찮은 추억 정도로 소환할 수 있을 만큼만, 해볼게. 다시 권유나 청유문으로 너희들에게 다가갈 것이야.


  사흘 낮, 사흘 밤은 내 인생에서 괄호 같은 날들이었다.

  정말이지 더 많이 채워지는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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