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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닝닝하고 밍밍한 Sep 05. 2019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 남편의 시원한 결단

  대형 마트는 혼자 가는 게 옳다.


  이것은 나와 남편의 소비의 결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연애시절부터 비롯된 나의 변하지 않는 생각이다.


  나는 마트, 대형쇼핑몰, 백화점을 가도 '가능한한 괜찮아 보이는 저렴한 물건'에 눈이 가고 남편은 '일단 괜찮아 보이는 비싼 물건'에, 그래서 저것을 가져야 겠다고 생각하는 물건에 늘 꽂힌다. 비싼 것은 비싼 값을 한다는 것이 남편의 주장이었고, 나는 언제나 그것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남편의 소비 기준은 일관되며 본인 물건이나 내것, 아이들것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도 왠일인지 남편이 원하는 물건은 내 손으로 꼭 사주고 만다. 못 이기는 척 하며. 알고 있다. 나도 비싼 물건을 보는 눈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다. 정작 구매하기로 결정하면 백화점에서 내가 고르는 물건은 남편이 생각했던 것보다 늘 더 비싸고 고급진 물건인 경우가 많다. 남편의 마음에 쏙 들 만큼.


  나는 이상하게 이런 구매 형태를 싫어하면서도 남편의 의견에 어쩔 수 없이 동의해버린다. 입혀보면 예쁘고 센스있고, 먹어보면 맛있고 신선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끝끝내는 남편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실망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다정도 병이다. 남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라고 묻는다면, 글쎄... 그렇다고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일단 좋은 말은 내 쪽으로 끌어와보자.

 

  어쨋든 마트에서의 구매 취향도 마찬가지다.

  일단 나의 구매 취향은 이러하다. 


1. 사야할 것들을 정리 메모한 쪽지를 들고 왠만하면 필요한 것들만 구매할 것
2. 1+1에 쓸데없이 현혹되지 않을 것
3. 불필요한 간식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것
4. 아이들의 취향에 맞는 한, 두개 정도의 간식만을 고를 것
5. 평소에 많이 먹는 식재료를 사되, 오늘 할인이 된다면 2개 정도는 쟁여놔도 괜찮다는 것
6. 시식 코너에서 영혼을 빼앗겨 카트에 물건을 호로록 집어 넣지 않을 것
7. 생필품들은 그 자리에서 인터넷 쇼핑몰과 비교해 보고 저렴한 쪽을 택할 것
8. 딱 내 두 손에 한 개씩의 쇼핑백에 담아올 정도의 물건만 살 것

  

  나의 구매 취향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저 간소화. 다른 데 눈 돌리지 않는.


  그런데 남편과 아이들이 마트에 따라가면 대형 참사가 생긴다. 혼자 갔을 때 보다 무려 3배는 지출하고야 만다. 상자 가득 무겁게 말이다.   

  아이들은 저마다 먹고 싶은 간식을 몇 개씩이나 담으려고 하고, 남편은 호기롭게 허용한다. 남편은 자상한 아버지의 모범을 가정에서 내 집 거실에서가 아니라 꼭 대형마트나 슈퍼, 장난감샵, 오락실, 혹은 게임을 할 때 유용하게 사용한다. 마치 아버지의 특권처럼, 소비를 부추기는 장소에서 과감하게 허용한다. 


  면음식을 좋아하는 남편은 라면을 취향대로 몇 봉지나 고르고 술은 한 방울도 안 마시지만 술안주에 어울릴만한 오징어, 쥐포, 온갖 진미채, 육포 등의 비싼 간식을 참 좋아하고 몰래 몰래 바쁘게 카트에 실어나른다. 지금은 다이어트와 운동 때문에 줄였지만 예전엔 아이스크림과 음료, 과자류도 어마어마하게 사 날랐다는 것. 그래, 조금 못마땅하지만 마트는 같이 오는 게 아니라며 속으로 다시 한번 되새기며 나는 카트 옆을 종종 거린다.


  남편은 회사를 마치고 집에 올 때도 손에 뭔가를 사들고 올 때가 많다. 혹은 회식을 마치고 자신이 먹은 것과 똑같은 것으로 나와 아이들이 먹을 것까지 사서 오거나 챙겨 올 때도 많다. 달마다 있는 뭔지도 모를 갖가지 기념일에도 꼭 나와 아이들 몫의 무언가를 꼭 사서 온다. 단 한번도 요구하지 않았고 서운해한 적도 없는데 말이다. 세상 자상한 남편과 아빠 맞다.


사실 그런 것들이 고마운 일이다.


  남편이 언젠가 말한 적이 있다. 예전에 어렸을 적 아빠가 두 손 가득 뭔가를 사오는 게 그리 좋았다고. 자신도 결혼하면 꼭 그리 하겠다고. 아이들과 식구들 먹는 것에는 아끼지 않을 거라고(더불어 모든 쇼핑의 저변으로 확대됐지만). 맞다. 아이들도 좋아하고 분위기도 좋다. 남편의 그 마음을 알기에 잔소리는 줄이고 나도 되도록이면 누리려고 노력한다. 다만 과한 지출은 나의 눈총을 사기도 한다.


  언젠가 안도현의 시를 읽고 마음이 되게 따뜻해진 적이 있다.

  아, 이런 마음이었구나. 내가 받아보지 못했던 마음.


  
  어릴 때, 두 손으로 받들고 싶도록 반가운 말은 저녁 무렵 아버지가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정육점에서 돈 주고 사온 것이지마는 칼을 잡고 손수 베어온 것도 아니고 잘라온 것도 아닌데
  신문지에 둘둘 말린 그것을 어머니 앞에 툭 던지듯이 내려놓으며 한마디, 고기 좀 끊어왔다는 말   
  가장으로서의 자랑도 아니고 허세도 아니고 애정이나 연민 따위 더더구나 아니고 다만 반갑고 고독하고 왠지 시원시원한 어떤 결단 같아서 좋았던, 그말

  - 안도현, 「간절하게 참 철없이」 중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p.62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돌아보면 남편이 나와 아이들에게 주고 싶었던 것도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사실 나도 그런 아빠를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남편의 이런 소비들이 말처럼 그리 나빴던 건 아니다. 가끔 너무 과하지 않은가해서 본의 아니게 적극적으로 말리는 부분이 있었지만, 남편의 마음에 빡빡했던 내 마음이 은근히 녹아나고 뭔지 모르게 마음이 가득해지고, 또 한편 남편의 그런 시원시원한 결단(?)이 지독하게 절약하고 넉넉하게 써보지 않았던 내 마음을 가만가만 위로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은 남편의 저런 발랄한 소비 취향이 어느 정도 종결되었지만(스스로 종결을 선언했다! 기특하게도), 우리 아이들도 나도 남편의 퇴근길 남편보다 남편의 손을 먼저 바라보게도 되고, 무엇보다 남편의 마음을 강박처럼 받아들이지 않는 지금이 참 좋다. 느슨하게 좀 풀고 살아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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