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스러운 친구는 태풍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이 커튼은 뭐냐고, 물었다. 친구야, 그저 버티컬을 분홍 보자기로 살짝 묶어 한껏 멋을 내 보았단다!
새벽부터 하루 종일 긴급재난문자와 안전 안내 문자가 번갈아 가며 쏟아졌다.
오늘만 해도 새벽 2시 45분을 시작으로 11건이다.
남편과 내 핸드폰에 동시에 알림 메시지가 뜬다. 풍랑경보, 어선 출항금지, 해안가 낚시 야영객 안전지대로 대비, 창문 파손 주의, 간판 등 부착물 고정, 선박 결박, 낙하물 주의 및 외출 자제, 야외활동 중단, 00 대교 양방향 전면 통제 실시 등 소란스럽고 요란한 경고의 메시지들이 쏟아져 왔다. 대체로 자제, 금지, 중단, 통제, 파손과 같은 이례적으로 강하고 무시무시한 색채를 띈 단어들만 골라서 말이다.
2012년 8월 28일, 어마어마한 태풍 '볼라벤'이 왔었다. 그 뒤 또 한 번의 태풍 '덴빈'이 한반도를 연달아 덮치며 엄청난 피해를 입혔던 것이 생각난다. 위에 글은 그때 쓴 메모였다. 아파트 19층에 살았던 우리는 모든 게 불안했다. 이날은 정말 기록적인 날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모두 다 베란다 창에 엑스표로 테이프를 붙이고 신문지를 붙여댔다. 우리 집에 종이라곤 아이들이 괴발개발 낙서질이나 하던 종이 쪼가리밖에 없으니 신문이 있을 리 만무했다. 여차하면 베란다 창이 부서질까 봐 울며 겨자 먹기로 침대 밑에서 뒹굴던 소식지들을 겨우 몇 장 모아 덕지덕지 붙여 놓았다(누군가는 뭔가 미술책에 현대미술 파트에 나올 법한 느낌이라고 말해주었다;;). 물을 계속 뿌려대다가 안 그래도 고흐의 밀짚모자를 내가 찢어버렸지 뭐니. 베란다 방충망 4개가 미친년 널 뛰듯 좌우로 노는 바람에 정말이지 간이 조마조마했던 날이었다.
2019년 13호 태풍 링링은 2012년에 왔던 볼라벤과 유사한 형태로 온다고 했다. 그때 생각이 많이 났다.
링링으로 인해 제주도에 갈 계획은 무산됐다. 예약해 두었던 호텔도 말이다. 항공기 수백 편이 결항되거나 지연이 되었겠지.
태풍의 강도는 매우 강하고 크기는 중형급의 세력으로 온다더니 정말 상상도 못 할 정도의 바람이 내리치고 장대비를 퍼부었다. 최대 순간 풍속이 초속 50-55m 정도라고 하는데, 이 정도 바람이 불면 나무가 뿌리째 뽑히는 건 물론 선박이나 자동차도 뒤집히고 간판이라든가 유리창이 떨어져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강도라고 한다(실제로 우리 아파트 옆 단지 20층엔 유리창이 깨졌다고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엔 주차장 담벼락이 무너지면서 시내버스 운전기사가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고 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우리 아이 친구는 아파서 입원을 했는데 병원에 정전까지 오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하니, 내가 알고 있는 피해만 이 정도일 뿐 기사나 TV뉴스를통해 보여지는 피해는 가히 어마어마했다.
비바람이 조금 잦아 들 무렵, 잠깐 차를 타고 남편과 볼일을 보러 나갔다.
가로수들이 넘어져있거나 반토막이 되고, 간판이 날아간 곳도 있고, 현수막들이 너덜너덜 가로수에 불안하게 매달려 있고, 도로와 인도는 태풍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 나뭇잎과 가지들로 을씨년스러웠다. 모든 것이 겪하게 흔들렸구나, 했다. 삶의 날씨들은 언제나 잘 읽히지 않고, 치욕처럼 선명한 후유증을 남긴다.
내일 새벽이면 태풍은 완전히 빠져나간다고 하니, 다행이다.
창문을 열었는데, 고요하다. 핏발처럼 곤두섰던 모든 것들이 희미하게 사라졌다. 흔들리던 것도 다 제자리다. 비바람 소리 대신 차바퀴소리, 사람들이 어울려 가는 소리들이 문득문득 들린다. 마치 노아의 방주에서 노아가 비둘기를 날려서 물의 높이가 낮아졌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이 밤, 귀 기울여 바깥소리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