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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닝닝하고 밍밍한 Nov 11. 2019

무욕을 연기하는 것 같지만

- 펄펄 끓었던 모든 관계들도 한 숨 식혀지기를

  나는 보통 일처리를 할 때 모든 일이 다 지나간 뒤, 혹은 혼자 의사결정을 다 마친 뒤, 가족과 주위에 알리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마찬가지이다. 좋은 일엔 다소 쑥스러움 때문에, 나쁜 일에는 어차피 혼자 해결해야 하는 일이라면 쓸데없는 말과 염려를 양산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다.


  가족들은 일이 다 해결된 뒤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진 내 말에, "왜 미리 말하지 않았냐, 왜 혼자 그리 힘들었냐", 라는 말을 하며 서운해 하지만 사실은 어떤 식으로든 일이 해결된 후에 하는 말은 안도감이 더 크다. 함께 한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 앞에서 염려를 함부로 나누는 일은 나에게 늘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조금 철이 들고 난 후로는 거의 모든 결정을 스스로 했던 것 같다. 공부를 시작할 때도 끝낼 때도, 성적표를 받아 들고도, 회사에 취업을 하고 퇴사를 할 때도, 결혼을 할 때도, 이사를 할 때도, 산후조리 때도, 작고 큰 수술을 할 때도 스스로 결정하고 도움이나 조언을 구한 적이 별로 없었다. 내가 철이 빨리 든 이유이기도 했지만, 기댈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또 그것을 빨리 깨달았기 때문에) 그렇게 습관이 들어 버렸다. 그게 딱히 슬프거나 힘들지는 않았다. 혼자라는 생각도 굳이 하지 않았다. 그냥 오랜 습관처럼 나의 일처리의 한 부분이었을 뿐이었다. 야무지게 마음먹고 들어간 회사를 그만 둘 때도 월요일 저녁 띵똥, 하고 엄마네 집 앞에 서 있던 나였다. 그 어떤 아무 언질도 없이 말이다. 몇 차례 수술을 하거나 아파서 입원을 했을 때도 나는 거의 혼자였다. 아이 둘을 낳고 고향도 아닌 공부하고 회사를 다니던 곳도 아닌 나를 아는 이가 단 한 명도 없는 먼 지방에서 혼자 정말 어찌어찌 두 살 터울의 사내아이들을 키우면서도 단 한 번도 양가 부모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고, 아이나 내가 아프거나 수술할 때에도 우리는 그저 우리 가족이 책임을 지고 살았다. 시어머니가 언젠가 그러셨다. 어디가 조금이라도 아프거나 무슨 일이 있으면 득달같이 전화를 하거나 찾아오거나 찾아갔던 시누이와는 달리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내뱉지 않은 나에게 "나는 네가 애를 엄청 쉽게 키우는 줄 알았다. 그저 아무 일도 없는 줄 알았다"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모른다. 말하지 않으면. 그건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나는 말을 잘 하지 않는 사람들을, 불평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자기 얘기를 잘하지 않는 사람들을 늘 눈여겨본다. 속에서 곪고 있지는 않은지 하고 말이다.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은 늘 어수룩하고 계산을 잘 하지 못하는 부류이다. 결코 따져 묻지 못하는.

  

  


  그래도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예전에 나는 정말이지 도와 달라는 말을 잘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것 좀 해주세요, 이것 좀 도와주세요, 이건 어떻게 해요?, 얘기 좀 들어주세요, 밥 좀 사주세요, 커피 좀 같이 마셔요"... 이런 말들을 잘하는 지인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부담스럽기도 했다.

  

  지인 중에 절대 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이가 있다. 늘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최대한 우아한 말투와 몸짓으로 늘 여유 있음을 과시하는. 봐도 봐도 겪어도 겪어도 잘 적응이 안 되는 타입이다.

  그녀는 말을 해야 할 포인트를 잘 아는 사람이다. 남들이 흥분해서 말하면 가만히 듣고 있다가 적절할 타이밍을 잡아 자신의 이야기를 조근조근 하는 부류, 자신이 원하는 일은 반드시 쟁취하고 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생각되는 그녀는 어쩌면 나와는 정반대의 부류였다. 그 사람도 어려운 형편에서 자존심 하나로 버틴 인생인데도 불구하고 늘 다른 사람에게 애교스럽게 "커피 사주세요, 밥 사주세요, 한 턱 쏘세요"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주 한다. 그러면서도 어느새 정색을 하며 곱고 현명한 여자의 자태로 앉아있거나 늘 지루할 정도로 조곤조곤하는 것이다. 몇 번을 개인적으로 만나도 단 한 번도 커피값, 밥값을 계산하지 않으면서 '니가 나 보고 싶었잖아'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누구를 만나도 깍듯하게 자신의 예의를 차리면서도 단 한 번도 지갑을 열어 본 적이 없는.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굉장히 스스로 어른스럽고 단정한 느낌을 주고 싶어 한다. 자신의 것은 한 톨 내주는 것도 머뭇대면서 남에게는 이것저것 요구한다. 놀랍게도 따져 묻는 일에 능하고 손해 당할 일은 절대 하고 싶어 하지 않고, 단 한 번도 몸을 써보지 않은 사람처럼 전형적으로 앉아서 입으로만 자기의 요구를 우아하게 말하는 스타일. 입에서 말이 떨어지자마자 몸을 움직이는 나와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던 거다. 자기 손으로는 자기가 마신 컵 하나 치우지 않은 채, 그저 입으로만 말하는 그런 사람 말이다.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착각했었던 것이다.

  나도 제법 상황 대처능력이 빠른 편인데 나의 일처리는 남자들의 것과 좀 비슷할 때가 있다. 단순하고 명료하고 신속한 것 말이다. 감정이 달라붙지 않는 그런 거 말이다.

  그녀는 언제나 머리 회전이 빠르고 손해 보지 않고 자신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방법, 남들 머리 위에 있다는 자만이나 우월감으로 이글거린다. 아닌 척하지만 '너희는 나만큼 생각 못하지? 나 같은 아이디어는 꿈에도 생각 못했지?' 하듯 훈계하는 게 명료한 말투도 말이다. 다른 이들을 끊임없이 하찮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처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확대해서 굉장한 의미부여를 하는 일에도 나는 가끔 지쳤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다가는 또 어찌나 처연히 우는지, 그녀에게는 울음도 자신을 드러내는 한 방편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 그녀도 자신에게 요만큼이라도 스크래치가 나면 그때서야 새된 목소리가 나온다. 이처럼 자신을 지키는 일에는 무엇보다 악착같다.


  그녀를 생각하면 예전에 읽은 권여선의 소설집 「분홍 리본의 시절」에 수록되어 있는 <가을이 오면>이라는 단편이 가끔 떠오른다.


내가 이렇게 간소하게 없이 살다 보니.
어머니는 남자 앞에서 무욕을 연기하고 있었다. 이불장과 삼단 서랍장, 책상 겸 밥상으로 쓰는 상 하나에 방석 두어 개뿐인 이 작은 방은 어머니가 무욕을 연기하기에 안성맞춤인 무대였다. 집요의 저편 같지만 또 다른 탐욕의 일종인 무욕. (p.31)


  얼굴도 못생긴 나에게 ‘로라’라는 낭만적인 이름을 지어주어, 외모와 이름의 현격한 낙차 속에 갇혀 살게 하고, 또 그녀에게 가혹할 만큼 집요하게 ‘우아’ 할 것을 강요한 어머니에게, 그녀는 언제나 열등하고 미달된 여성일 뿐이다. 애초부터 우아의 능력이 결여된 그녀와는 달리 언변이 좋고 초연하고 무아지경적 우아를 구사하는 연극적인 어머니는 실제로 유산을 거의 바닥내고 집까지 날리고 빚 때문에 한적한 변두리 교회에 은신하는 중이다. 남의 돈과 남의 인생을 몽땅 훔쳐가 탕진한 주제에 언제나 차분한 얼굴에 미역같이 매끄러운 우아의 냉기를 띈 채 말이다.


  

  그녀도 그랬다.

  늘 무욕을 연기하는 것 같지만 언제나 마음 한편으로는 탐욕을 드러내는 부류였다. 그녀가 불편한 지점들이 그런 것이었다.

  

  이런저런 상념들이 지나간다. 11월은 꼭 그렇다. 애매하게.

  펄펄 끓었던 모든 관계들도 한 숨 식혀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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