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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닝닝하고 밍밍한 Nov 16. 2019

행복의 이중성

- 뜨겁거나 배타적이거나

  랑의 에로스 또다시 나를 마디마디 풀리게 흔드는구나.

  달콤하며 쓰디쓴, 대책 없는, 그 휘감는 신이여 (사포 조각 글 130)


  시인 황지우는 <몹쓸 동경憧憬>이라는 시에서 ‘괴롭고 달콤한 에로스’라는 말을 썼다(아마 그리스 여류시인 사포의 시를 이렇게 녹여서 쓴 듯하다. 물론 나는 황지우의 '괴롭고 달콤한 에로스'라는 말이 더 좋지만!). 오래전에 본 영화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에서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뺏긴 남자가 여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윤아야, 나 다시 너한테 미치게 해 줘”라고. 다른 무엇이 아니라 그저 행복 그 자체를 소유하고 싶은 사람들, 그렇지만 에로스는 늘 괴로움을 동반하고 한 번 미쳤던 일에는 쉬이 미쳐지지 않는다. 행복은 원래 이처럼 다루기 어려운 법이고 늘 옳지 않은 일에 노출되어 있다.


  언제부턴가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절대적'이라는 말을 잘 믿지 않는다. 사랑을 할 때도 충분히 달콤하다고 느끼는 순간 이미 괴로운 쪽으로 마음을 굳히고 있거나, 미지근할 때를 대비해서 처음부터 별나게 미치지 않기로 했다. 행복해지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시간을 줄여, 조금씩 다른 감정들이 치고 들어올 수 있는 자리를 미리 확보해 두기도 했다. 무엇이 치고 올라와도 놀라지 않고, 불행해지지 않도록 말이다. 덜 욕망하는 일이 때로는 그 욕망의 시간을 지연시켜 주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행복에 대해 무덤덤한 편이다. 그렇다고 불행에 가까운 것도 아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잡스러운 일들을 오롯이 겪기도 했지만, 그게 내 불행을 모조리 뒷받침할 만큼 여리고 무지하지도 않다. 다만, 흠 없이 완벽한 것에 대해선 조금 집착하는 편이다. 불행히도 이것은 뼛속까지 불안한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를 다시 읽었다.



  그저 행복 그 자체를 소유하고 싶었던 데이비드와 헤리엇이 그토록 처절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무래도 단순하다. 그들 스스로 행복을 재촉했기 때문이다.


  “우린 벌 받는 거야. 그뿐이야... 잘난 척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야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행복해서”(p.159)

  

  완벽한 행복이라니, 가당찮다.

  선택된 몇 명 외엔, 우리 인생은 언제나 얼마쯤은 처절하다. 누구나 그것을 순하게 받아들일 수 없을 뿐이다. 문제는 언제나 냉정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오로지 행복해야겠다는 일념 하에 빅토리아풍의 거대한 집을 장만하고, 부활절, 여름휴가, 크리스마스 같은 날들은 가족들로 가득 채우는 것으로 그들의 일상을 반짝반짝 빛나게 장식한다. 그러나 다섯째 아이를 가지면서 그들은 불행해진다. 다섯째를 임신한 '헤리엇의 시간은 고통을 내포한 인내로 가득 찼고, 그녀의 두뇌에는 환영과 망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자신 안에 있는 아이를 야만적인 것으로, 원수로 여기며 진정제를 복용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마치 특별한 유전자 인양, 다섯째 아이 벤은 엄청난 식욕과 에너지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한 마리의 거칠고 난폭한 짐승이었다. 그들의 가정은 이미 파괴되고 있었다.


  비난과 비판과 혐오. 벤은 이런 감정들을 야기했고 사람들 안에 있던 이런 감정들을 밝은 빛 아래로 끌어내었다(p.80).


  행복의 치수는 대체로 일정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로 충분히 잴 수 있지만 불행의 치수는 언제나 그 기준치를 훌쩍 넘긴, 일정하지도 동일하지도 않은 것이다. 그들은 행복에 너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불행의 허무하고 암담한 분위기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했다. 뜨겁거나 배타적이거나, 그것이 행복의 이중성이다.


  자신의 삶이 주는 스트레스 때문에 그녀는 육체의 껍질이 한 겹 벗겨진 것 같았다. 물론 진짜 표피는 아니지만, 아마 눈에 보이지도 않고 사라지기 전까지는 전혀 의심해 보지도 못하는 형이상학적인 본질이.(p.152)


  불행과 위험 앞에서 사람들은 내면을 그대로 노출시킨다. 그것은 해독할 필요도, 얼버무릴 필요도 없는 단순하고 완강한 것이다. 결국 '귀신이 바꿔다 놓은 이상한 아이'인 다섯째 아이는 추방되고 만다.

  흠 없고 완벽한 것들 앞에선 작은 생채기도 쓰리고 따갑다. 어떤 행복은 이상이거나 허구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불행이 좀 더 영민하게 기억될 뿐, 행복이라는 것이 실체 없는 허구는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행복에 대해, 행복에 대한 완벽하고 몹쓸 동경에 대해 비난하고 싶진 않다. 누구나 몹쓸 바람들은 가지고 있으니까.


  다만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는 일에서도 불행 앞에서도 얼마쯤의 냉정을 잃지 않기를, 내 감정의 지나침을 뛰어넘을 수 있기를, 고통 속에서 질식하지 않기를, 황폐해지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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