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 프로필에 적어 놓은 글은 니가 쓴 것이냐, 그러면서 글 잘 쓰는 사람이 부럽다고 한다거나 글을 쓰고 있는 나를 여전히 신기해하며. 진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말을 종종 듣는다. 혹은 어려운 자리에 써야 될 글을 부탁하기도 하고, 청첩장이나 돌잔치에 들어갈 문구, 혹은 언젠가 친구의 남자 친구가 부탁한 글까지 써줬던 때도 있었다. 부탁만 하면 뚝딱, 글이 나오는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잘 쓰잖아, 부탁해, 하고. 내가 밤새 얼마나 몰두하는지에는 그리 관심이 없다. 아니 모른다고 하는 게 더 맞겠지. 알려 줄 생각도 없지만. 만사 귀찮아하는 선배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써준 글은 오히려 선배를 그 프로젝트의 팀장으로까지 가게 만드는 어처구니없고 귀찮은 상황까지 몰고 가기도 했다. 그 선배의 당황이 아직까지 느껴진다. 회사의 사보나 회사 교육용 콘텐츠의 글들, 새로 나올 책의 카피나 서평들을 쓰면서도 나는 항상 그런 것들 말고, 그저 내가 쓸 수 있는 고유한 감정의 글들에 늘 목말라했던 것 같다.
나는 시를 오래 썼다. 아니 띄엄띄엄 가늘게 오래 썼다고 하는 게 맞겠다. 잘 써질 때도 있었고,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몇 년을 시에서 멀어져 있기도 했고, 의도적으로 시를 멀리한 적도 있다. 그럴 때에도 늘 시집은 옆에 끼고 살았다. 시는 내 글의 원천이었고, 슬픔에도 운율이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슬픔이 각을 잡기 시작하면 얼마나 유려하고 아름답게 승화될 수 있는지, 울음도 한 줄의 시가 될 수 있고 그것이 내가 지은 최초의 문장과 최후의 문장이 될 거라는 것을 처연히 알려주었다.
... 손쉬운 상징과 타협하지 않고, 그걸 감당하기 위해 얼마나 이를 악물었을 것인가?
황혜경의 시집 <느낌 氏가 오고 있다>의 해설 마지막 부분에서 문학평론가 정과리가 황혜경 시인에게 던진 말이다. 나 또한 글을 쓸 때마다 유려한 문장과 아름다운 상징을 쓰고 싶어 안달을 냈다. 그래서 오랜 시간 글을 고치고 머뭇대는 순간들이 많았다. 다 시에서 얻은 생각이고, 마음이었다. 나는 시에게 내 인생의 많은 것을 들켰고, 많은 빚을 졌고, 그렇다 보니 다른 곳에서 뺨을 얻어 맞고 시 앞에서 늘 울음을 터트렸다. 내가 쓴 시에게 안부를 묻는 날이 종종 있다. 내 통증은 오랜 역사를 지녔고, 나는 그 그늘 아래서 다분히 위로받았다. 나는 아직 내 감정의 절정을 살고 싶다고 느낄 때마다 시를 읽는다. 그럴 때면 시는 밋밋한 마음에도 희미한 굴곡을 그려준다.
잎이 떨어진다. 그들은 대체로, 어디로 갈 것이지 묻지 않는다.
최근의 나는 나를 설명하는 글을 종종 쓰고 있다. 나는 이것을 에세이라고 부른다. 이 글은 생각보다 융통성 있고 유연하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유서 깊은 낙담과 슬픔을 담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나는 기획과는 무관한 글을 쓰고 있다. 내 글은 조금의 기획도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나는 그냥 글만 쓰는 사람이고 싶었다. 마케팅과 퍼포먼스, 트렌드, 이슈, 콘텐츠에 나를 껴 넣을 생각도 능력도 없는 사람임을 고백한다. 나는 잡지를 만든 적도 출판사에 다닌 적도, 출판과 관련된 여러 일을 하며 산 적도있지만 나는 외골수적으로 '글'에만 집착하는 나를 본다. 두려움이 나를 쓰게 했고 이 두려움이 여전히 나를 지키는 힘이 되었다. 시대가 변하니 글도 변하고 그저 마케팅의 한 부분으로 전락한다는 느낌이 들 때도 많다. 처음부터 마케팅에 염두에 둔 글들도 있을 것이고 취향저격과 인기의 최전선에 있는 글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늘 그런 것들과 동떨어져 있다. 나는 아직도 그저 쓰기만 하면 되는 시간 안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팔리지 않고 몰려들지 않는다. 더 이상 생산적이지 않고 신박하지 않다는 것이 내 글에 대한 자체 평가다. 이런 식의 반성, 혹은 자기비판 혹은 끝없는 정체. 이 글은 내가 정체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빙 둘러말하는 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