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닝닝하고 밍밍한 Nov 27. 2019

이런 식의 반성, 혹은 자기비판 혹은 끝없는 정체

  

사람들은 종종 내게 글을 쓰는 것에 대해 물어올 때가 있다.

  카톡 프로필에 적어 놓은 글은 니가 쓴 것이냐, 그러면서 글 잘 쓰는 사람이 부럽다고 한다거나 글을 쓰고 있는 나를 여전히 신기해하며. 진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말을 종종 듣는다. 혹은 어려운 자리에 써야 될 글을 부탁하기도 하고, 청첩장이나 돌잔치에 들어갈 문구, 혹은 언젠가 친구의 남자 친구가 부탁한 글까지 써줬던 때도 있었다. 부탁만 하면 뚝딱, 글이 나오는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잘 쓰잖아, 부탁해, 하고. 내가 밤새 얼마나 몰두하는지에는 그리 관심이 없다. 아니 모른다고 하는 게 더 맞겠지. 알려 줄 생각도 없지만. 만사 귀찮아하는 선배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써준 글은 오히려 선배를 그 프로젝트의 팀장으로까지 가게 만드는 어처구니없고 귀찮은 상황까지 몰고 가기도 했다. 그 선배의 당황이 아직까지 느껴진다. 회사의 사보나 회사 교육용 콘텐츠의 글들, 새로 나올 책의 카피나 서평들을 쓰면서도 나는 항상 그런 것들 말고, 그저 내가 쓸 수 있는 고유한 감정의 글들에 늘 목말라했던 것 같다.


  나는 시를 오래 썼다. 아니 띄엄띄엄 가늘게 오래 썼다고 하는 게 맞겠다. 잘 써질 때도 있었고,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몇 년을 시에서 멀어져 있기도 했고, 의도적으로 시를 멀리한 적도 있다. 그럴 때에도 늘 시집은 옆에 끼고 살았다. 시는 내 글의 원천이었고, 슬픔에도 운율이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슬픔이 각을 잡기 시작하면 얼마나 유려하고 아름답게 승화될 수 있는지, 울음도 한 줄의 시가 될 수 있고 그것이 내가 지은 최초의 문장과 최후의 문장이 될 거라는 것을 처연히 알려주었다.


... 손쉬운 상징과 타협하지 않고, 그걸 감당하기 위해 얼마나 이를 악물었을 것인가?


  황혜경의 시집 <느낌 氏가 오고 있다>의 해설 마지막 부분에서 문학평론가 정과리가 황혜경 시인에게 던진 말이다.  나 또한 글을 쓸 때마다 유려한 문장과 아름다운 상징을 쓰고 싶어 안달을 냈다. 그래서 오랜 시간 글을 고치고 머뭇대는 순간들이 많았다. 다 시에서 얻은 생각이고, 마음이었다. 나는 시에게 내 인생의 많은 것을 들켰고, 많은 빚을 졌고, 그렇다 보니 다른 곳에서 뺨을 얻어 맞고 시 앞에서 늘 울음을 터트렸다. 내가 쓴 시에게 안부를 묻는 날이 종종 있다. 내 통증은 오랜 역사를 지녔고, 나는 그 그늘 아래서 다분히 위로받았다. 나는 아직 내 감정의 절정을 살고 싶다고 느낄 때마다 시를 읽는다. 그럴 때면 시는 밋밋한 마음에도 희미한 굴곡을 그려준다.

  


잎이 떨어진다. 그들은 대체로, 어디로 갈 것이지 묻지 않는다.


  최근의 나는 나를 설명하는 글을 종종 쓰고 있다. 나는 이것을 에세이라고 부른다. 이 글은 생각보다 융통성 있고 유연하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유서 깊은 낙담과 슬픔을 담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나는 기획과는 무관한 글을 쓰고 있다. 내 글은 조금의 기획도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나는 그냥 글만 쓰는 사람이고 싶었다. 마케팅과 퍼포먼스, 트렌드, 이슈, 콘텐츠에 나를 껴 넣을 생각도 능력도 없는 사람임을 고백한다. 나는 잡지를 만든 적도 출판사에 다닌 적도, 출판과 관련된 여러 일을 하며 산 적도 있지만 나는 외골수적으로 '글'에만 집착하는 나를 본다. 두려움이 나를 쓰게 했고 이 두려움이 여전히 나를 지키는 힘이 되었다. 시대가 변하니 글도 변하고 그저 마케팅의 한 부분으로 전락한다는 느낌이 들 때도 많다. 처음부터 마케팅에 염두에 둔 글들도 있을 것이고 취향저격과 인기의 최전선에 있는 글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늘 그런 것들과 동떨어져 있다. 나는 아직도 그저 쓰기만 하면 되는 시간 안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팔리지 않고 몰려들지 않는다. 더 이상 생산적이지 않고 신박하지 않다는 것이 내 글에 대한 자체 평가다. 이런 식의 반성, 혹은 자기비판 혹은 끝없는 정체. 이 글은 내가 정체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빙 둘러말하는 글이기도 하다.


작가의 이전글 행복의 이중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