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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닝닝하고 밍밍한 Dec 19. 2019

모래는 쉬지 않으니까요.

- 무너져 내리는 모든 것을 퍼올리는 행위

  아무리 치워도 쓸어도 끝이 없는 일이 있다. 또 그런 관계들이 있다. 주변인 중에 환청, 환미, 환촉과 광장 공포증, 폐소공포증 그리고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는 이가 있다. 알코올 의존성도 강해 문자로 전화로 주위 사람들에게 강박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가족은 또 어떤가. 팔자 운운하며 끝없이 서운함을 토로할 때가 있다. 꾸역꾸역 연결되고 결합되는 모든 관계와 일들 앞에서 모래를 파내던 그 남자와 여자가 떠오른다.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




  이 소설은 한번 손에 잡으면 스윽 읽힌다. 생각보다 가독성이 좋은 소설이다.

  모래땅으로 곤충 채집을 나선 한 남자의 실종사건으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모래 언덕에는 깊게 판 모래 구덩이들이 있었고 한 여자가 살고 있는 그 구덩이 속에 갇히게 된 남자는 흘러내리는 모래에 파묻히지 않게 매일 끝없이 삽질을 해야만 하는 기이하고도 황당한 이야기이다. 모래 구덩이, 고립, 공포, 비현실, 허망함, 탈출... 사실 소재면에선 흥미롭지만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는 그리 신선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정도의 비현실과 공포는 모래 구덩이가 아니더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실은 모래 구덩이처럼 푹푹 빠지는 위태롭고도 허망한 세상이 아니냐, 하는 식상한 결론에 이르게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반전이 없더라도 어쩌면 누구나 그 끝을 자연스레 예감하고 적당히 입 안이 껄끄럽고 내내 모래를 판 듯 양 어깨가 뻐근해지는 정도의 후유증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실은 모래의 이미지에 대한 작가의 사유가 퍽 마음에 들었다.

  앞부분을 약간 인용하자면,


  지상에 바람과 흐름이 있는 이상 모래땅의 형성은 불가피한지도 모르겠다. 바람이 불고 강이 흐르고 바다가 넘실거리는 한, 모래는 토양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되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어 다닐 것이다. 모래는 절대로 쉬지 않는다.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지표를 덮고 멸망시킨다.  
  유동하는 모래의 이미지는 그에게 뭐라 말할 수 없는 충격과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모래의 불모성은 흔히 말하듯 건조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끊임없는 흐름으로 인해 어떤 생물도 일체 받아들이지 못하는 점에 있는 것 같았다. 일 년 내내 매달려 있기만을 강요하는 현실의 답답함에 비하면 이 얼마나 신선한가.  
  물론 모래는 생존에 적합하지 않다. 그렇다면 정착은 과연 생존에 절대적으로 불가결한 것인가. 정착을 부득불 고집하기 때문에 저 끔찍스러운 경쟁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만약 정착을 포기하고 모래의 유동에 몸을 맡긴다면 경쟁도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사막에도 꽃은 피고 벌레와 짐승도 산다. 강한 적응력을 이용하여 경쟁권 밖으로 벗어난 생물들이다.

  -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p.19-20


  일 년 삼백육십오일 움직이는, 절대로 한 곳에 머물지 않는 유동적인 성격이 바로 모래의 생명이라고 말한다. 나는 사막에 대한 동경이 있었는데 언젠가 그것을 불길한 충만함과 정체라고 여겼다. 그런데 책의 초입 부분에 나오는 모래의 속성, 즉 유동성에 관한 이야기는 굉장히 흥미로웠다. 모래에 대한 나의 상상과 상징을 뒤엎는 그런 것이었다. 내가 좀처럼 생각해보지 않았던 '유동하는' 모래의 이미지는 형태조차 제대로 갖고 있지 않은 모래, 이 무형의 파괴력을 가진 모래를 '어쩌면 형태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야말로 힘의 절대적인 표현이 아닐까'(p.36)라고 작가는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게다가 유동과 정착에 대한 작가의 깊은 사유는 내 마음을 충분히 흔들었다. 정착과 안정에 대한 욕구가 강한 나에게 유동하는 삶, 그러니까 사라지고 흐르고 스며드는 삶은 마치 못 갖춘마디처럼 저 혼자 열광했던 필사적인 흔적 같다.


  무너져 내리는 모래를 퍼 올리는 것, 하루라도 퍼 올리지 않으면 끊임없이 무너져 내리고 마는 것, 모래 구덩이를 벗어나 다른 세계를 꿈꾸는 것. 이건 비현실이 아니라 여기, 우리가 사는 지극히 평범한 현실이다. 어깨가 내려앉을 것 같아도 입 안에 까실 까실한 모래가 씹혀도 삼키고 일어나야 할 비현실, 아니 현실. 우리는 다시 모래 구덩이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게 현실이 우리에게 주는 횡포, 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한통의 전화를 받고 나는 문득 <모래의 여자>가 생각났다. 진저리 나게 모래를 씹고 있는 중이다. 무너져 내리는 것을 퍼 올리는 모든 행위는 필사적이고 악착같다. 사막의 모래는 한 줌 퍼올릴 때마다 늘 처음 만지는 그런 것일 것이다. 아무리 똑같아 보이는 알갱이일 지라도. 형태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슬픔과 한숨일지라도. 그러므로 여전한 모래를 퍼 올릴 때라도 새로운 기분이고 싶다. 나는 무너지는 마음의 제일 밑바닥, 그 밑바닥을 만나기 위해 오늘도 여전히 모래를 퍼 올린다. 아마, 당신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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