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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닝닝하고 밍밍한 Jan 30. 2020

고기나 돈을 주세요.

- 정말 살 맛 납니다.

  

  넉 달에 한번 정수기 코크 교체와 스팀 청소를 위해 매니저가 방문한다. 원래 정수기 물을 좋아하지 않아서 끓여 먹거나 아주 가끔 생수를 사 먹었던 터라 굳이 정수기를 설치하지 않았었는데 언제부턴가 내 삶에서 물에 대한 감각도 달라졌다. 물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진 것은 우리 삶을 크게 변화시켰다. 누구나 어디에서나 그냥 먹어도 되는 물에서 깐깐하게 걸러먹는 것으로 변화됐고, 물을 길어오거나 끓이는 수고로운 노동에서 벗어나게 했다. 또한 물도 더러워질 수 있다는 거, 그래서 사 먹거나 거의 대부분 정수기를 통해 걸러져 나온 물이 우리 몸을 데운다는 것.


  썰이 길었지만, 무튼 내가 하려던 말은 물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 넉 달 만에 온 매니저는 저번에 왔던 분이 아니었다. 새롭게 바뀐 여성 매니저였다. 그전까지는 얼핏 봐도 많아봤자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키 큰 남자분이었다. 처음에는 남자분의 방문이 극도로 불편해서 꼭 우리 두 어린 아들들에게 소파에 앉아있기를 미리 당부해뒀다. 아이들은 앉아서 저 어린 형아가 정수기의 부품들을 어찌 바꾸나 하고 노려보고 있을터. 아이 둘은 소파에 앉아 계속해서 형아의 몸짓을 지켜보다가 나한테 소곤소곤 질문을 하고 나는 괜히 어색해서 거실을 갔다 왔다 그러는 것이다.


  한참을 그 어린 형아를 지켜보다가 아이들 친구 엄마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공부하러 학원 가기 싫어서 몸을 베베 꼬는 아들에게 "너 공부 안 하면 나중에 커서 저렇게 된다", 하고 가리킨 사람은 바로 오토바이를 타고 치킨 배달을 하는 꽤 나이가 있어 뵈는 아저씨였다. 한눈에 봐도 사장님은 아닐 거 같았다고. 아무튼 그 아이는 한참을 바라보면서도 별 말이 없었다고 한다. 아이는 순진하게 '아, 좋겠다. 맨날 치킨도 먹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내 아들 친구의 엄마는 그 순간 몹시 우쭐했을지도. 아이가 엄마인 자신의 말을 엄중한 경고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현실적인 엄마의 현실적인 가르침일지는 모르겠지만 듣는 나는 몹시 민망했던 기억이 난다. 아들 친구의 엄마 눈에 이 어린 형아가 먼저 보였다면 그 타깃은 이 어린 형아가 됐을 것이다. 공부 안 하고 놀기만 하면 이렇게 남의 집에 정수기 부품이나 교체하러 다닌다고 말했을 것이다 아마.


  재작년 내 아이가 야구 선수가 되겠다고 난리 친 적이 있다. 야구에 대한 마음이 몹시도 진지하여 곧 국가대표가 될 기세였고, 메이저리그로는 당연히 나가는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서 이 어린것이 나에게 당당히 말하는 것이다. "엄마, 나는 야구 선수가 될 건데 공부는 왜 해요?", 하고 말이다.


  "엄마, 영어 공부하는 건 이해가 돼요. 어차피 나 외국 생활해야 되니까."

  "그... 그렇지!"


  "그런데 수학은 왜 해요?"

  "야, 이 녀석아. 너 메이저리그 가면 억대 연봉받을 건데 0이 몇 개 붙었는지 계산은 해야지 않겠니?"

  "아.... "


  "그런데 국어는요? 국어는 왜 해요?

  "잘 들어봐. 너 국어를 안 하면 만약 구단에서 계약서 내밀 때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읽을 수 있겠니?"

  "아... "


  "그런데 음악은 왜 해요? 진짜 싫은데!"

  "야, 너 야구 때문에 스트레스 쌓이면 야구로 스트레스 풀 거야? 노래도 부르고 연주도 하면 좋을 거 아니야..."

  "아... "


  아이와 이런 대화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요즘 아이들은 '당연히'라는 말에 대해 순하게 반응했던 우리 때와는 달리 당연히 해야 되는 것에 대한 거부와 반발을 자연스럽게 표출한다. '당연히'라는 말은 당연히 없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사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은연중에 '당연히'를 강조하고 '당연히' 했던 과정들 속에서 유의미한 결과가 도출된다고 어쩌면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은 없는 것이며 유의미한 결과는 누구를 위한 유의미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나는 우리 아이에게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딱 그 기본만 하자는 주의이긴 하다. 집에 와서는 학교에서 그날 배운 것들을 문제집을 통해 복습하는 정도이다. 우리 아이는 초등 고학년이지만 그동안 학습지도 한 번도 안 해봤고 공부 관련 학원, 공부방, 과외 등의 학교 외의 수업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이것은 아이가 원하기도 했지만 (사실 사교육에 대한 불신이라기보다는) 원치 않을 때 억지로 사교육 현장으로 밀어 넣지 말자는, 평소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물론 아이가 조금 더 커서 어떤 어떤 공부가 필요하다, 학교 수업으로는 부족하다고 요청하면 해 줄 의향이 있다. 우리 아이 친구들은 우리 아이에게 학원이나 공부방을 다니지 않아서 정말 부럽다고 그리 말한다고 한다. 우리 아이도 그게 제법 으쓱한 모양이고. 그게 으쓱할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는 아마 최대한 자연스럽게 자라게 될 것이다. 아이가 커서 무엇을 할지, 무엇이 될지, 사실 많이 궁금하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거나, 월급을 적게 받는 직장을 가질 수도 있고, 그냥 현실에 쫓기며 허덕이는 그런 삶을 살 수도 있다. 집요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더니 결국 해냈네, 하는 그런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르고. 결국 이 모든 게 아이의 몫이고 선택도 결과도 이 아이의 것이 될 것이다. 아이가 고학년이 되니 나에게도 조금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 아닌 척 하지만. 나는 언제까지 내 이런 마음을 유지할 수 있게 될지는 모르지만 아이에게 나의 불안감을 들키고 싶지 않고, 정말로 불안해하고 싶지 않다. 아이는 아이대로 결과에 충실한 삶을 어떤 식으로든 살아갈 것이다.

  

  내 아들 친구의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오를 때면 문득문득 정수기 부품을 교체하던 그 어린 형아가 떠오른다. 그리고 얼마 전 기사에서 봤던 태사자 출신 가수 김형준이 연예계 은퇴 후 쿠팡 맨으로 일했다는 기사도 떠오른다. 모든 이들이 각자의 삶을 산다. 어떤 식으로든. 알 수 없는 삶이다. 함부로 쉽게 사람에 대해 평가하는 일이 참 두렵다. 동정하는 일 따위도, 불쌍히 여기는 것도, 상대로 인해 스스로를 위로하는 일도 하지 않기를, 나와 우리 아이에게 바란다. 걱정과 불쌍히 여김을 당하는 그런 자리에 우리 아이가, 당신의 아이가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식의 남 걱정(?)을 할 바에는, 정말로 남이 걱정된다면, 차라리 고기나 돈을 주는 것이 좋겠다. 명언이다. 정말 살 맛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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