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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닝닝하고 밍밍한 Jan 08. 2020

걷는 사람

- 어떻게 하면 하체는 상큼해지나요?

  얼마 전부터 목과 어깨를 정확하게 구분할 수 없는 통증과 팔 저림이 찾아왔다. 큰 잔을 들고 커피를 마시다가도 노트북에 또각또각 글씨를 새겨 넣다가도 새끼손가락 마디가 시큰거린다. 또 목디스크다.


  키가 크지 않은데도 자세가 늘 구부정하다는, 혹은 어깨가 한쪽이 내려왔다는 지적을 하루에도 몇 번씩 듣기도 하는 나는 이 온전치 못한 생활 습관이라는 장벽 앞에서 늘 무너진다.

  언제나 고개를 숙이고 볼 수밖에 없는 사랑스러운 책이나 내가 애정해마지 않는 핸드폰, 노트북 따위들, 늘 나라를 구하나 싶을 만큼 몸을 날래게 움직이는 노동에는 익숙하지만 내 몸에 근력을 키우거나 적절한 햇빛을 쪼이며 산책을 하는 일에는 인색한 이런 나쁜 자세와 생활 습관들은 오롯이 병적 증세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것은 미련했던 만큼 강력하게 나타난다. 운동, 운동이 시급히 필요하다.

  

  나에게 운동이란 필라테스나 수영이나 테니스나 요가나 이런 것들은 아니다. 이런 것들인 적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아니다. 그저 좀 걷는 것. 그게 내 낯부끄러운 운동 역사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걷는 것을 좋아하지만 걷는 것을 오래 규칙적으로 지속했던 적은 없다. 다시 말하자면 걷기를 운동의 영역으로까지 확장시켜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굳이 나의 걷기의 패턴을 말하라고 한다면 '적게, 적게, 혹은 굉장히 많이, 혹은 아무것도, 다시 적게, 적게' 같은 비정규직 뺨치는 게릴라 식 걷기 형태를 취하고 있다. 민망할 정도로. 걷기가 제대로 운동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즈음 <걷는 사람, 하정우>를 읽었던 적이 있다. 하정우는 이를 '하체가 상큼해지는 시간'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길 끝에 이르면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거라 기대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농담처럼 시작된 국토대장정은 걷기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우리가 길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내 몸의 땀냄새,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꿉꿉한 체취, 왁자한 소리들, 먼지와 피로, 상처와 통증...... 오히려 조금은 피곤하고 지루하고 아픈 것들 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별것 아닌 순간과 기억들이 결국 우리를 만든다. p.26

  내 갈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걷는 것, 내 보폭을 알고 무리지 않는 것, 내 숨으로 걷는 것. 걷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묘하게도 인생과 이토록 닮았다. p.41

  나는 걸을 때 발바닥에서부터 허벅지까지 전해지는 단단한 땅의 질감을 좋아한다. 내가 외부의 힘에 의해 떠밀려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뿌리내리듯 쿵쿵 딛고 걸어가는 게 좋다. p.42-43
  
  오늘 우리가 고단함과 귀찮음을 툭툭 털고서 내딛는 한 걸음에는 돈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 나의 오늘을 위로하고 다가올 내일엔 체력이 달리지 않도록 미리 기름 치고 돌보는 일.
  나에게 걷기는 나 자신을 아끼고 관리하는 최고의 투자다. p.69

  장거리를 걸을 때는 지치기 쉽다. 판단력도 흐려진다. 그러므로 걷는 시간보다 더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때가 있다. 바로 '쉬는 시간'이다. 평소보다 많이 걸을 때는 운동화 속의 아주 작은 모래 알갱이 하나가 발바닥 전체를 망가뜨릴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러면 잘 참고 걸어왔던 그간의 시간도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쉬는 시간에는 지쳤다고 숨만 훅훅 몰아쉴 것이 아니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운동화 속과 두 발의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하며 다음 오십 분을 준비해야 한다. 지쳤다고 그냥 늘어진 채로 목구멍에 물만 들이부으면 영락없이 탈이 난다.
  누구도 쉬지 않고 계속 걸을 수는 없는 것이다. p.80-81

  죽을 만큼 힘든 사점을 넘어 계속 걸으면, 결국 다시 삶으로 돌아온다.   
  죽을 것 같지만 죽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조금 더 걸을 수 있다. p.82



  

  

   배우로서 하정우만 알았지, 생활인으로써 걷는 사람으로서의 하정우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의 걷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사실은 어마어마한 양을 걷는 그를 도저히 따라 할 수는 없었다, 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터. 웬만하면 걸어 다닌다는 그는, 살아있는 한 계속 걷고 싶다는 그의 걸음의 역사는 과히 대단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하루 3만보를 걷고 혹은 5만보까지는 별다른 준비운동 없이도 가능하다는, 그리고 가끔은 10만보를 걷는다는 그를 보며 이 투박하고 정직한 걷는 행위가 예술의 경지에도 이를 수 있겠구나 싶을 정도였다. 걷는 그는 굉장히 매력적이었고, 걸음에 대한 그의 철학은 혹독하면서도 생생하며 감동적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일단 걷는 일을 좀 더 충만하게 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물론 '나만의' 방식이지만 말이다. 저녁밥을 거하게 먹는 날은 자연히 운동화 끈을 매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소처럼 누워 배를 두들기다 두들기다 소화가 도저히 안 돼서 떠밀리듯이 산책로로 밀려 나오기를 수차례 반복하기도 하고, 밥을 먹고 설거지 후 두 아이는 아이 아빠에게 맡겨두고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을 때에도 걷는 일은 운동 이상의 상쾌한 기분을 선사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한동안 저녁 무렵을 서성거리는 일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듯했다. 그렇지만 그것도 길게 가지는 못했다. 춥기도 했고, 가끔 무섭기도 했고, 무엇보다 귀찮음을 이길 방법이 없었다. 아.


  최근 나에게 러닝 머신이 생겼다. 아침을 먹기 전 좋아하는 음악이나 책이나 기사를 읽어주는 앱을 열어놓고 30분 정도 천천히 혹은 빠르게 걷는다. 나에게도 이런 사소한 루틴이 내 삶의 순수한 기쁨을 주기를 기대해 본다. 그러면서 나도 하정우식으로 생각해본다.


  '어차피 길게 갈 일'이라고. 그리고 끝내 어떤 식으로든 잘될 것이라고.


  나는 여전히 운동의 초입에 있고 이 초입은 어디서 어디까지 이어질지, 계속 초입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내친김에 막연하게라도 하정우식으로 생각하며 주문처럼 입을 열어 말이라도 뱉어보는 것으로 내 운동의 초입을 장식해볼 생각이다. 나를 기름치고 돌볼 수 있게 말이다. 그가 말한  '우직하게 걸어서 끝끝내 내가 닿고자 하는 지점에 가는 것'에 대해서는 나도 오래 생각했지만 운동에도 이런 생각들을 억지로라도 구겨 넣어 볼 생각이다. '우직하게'라는 말은 새삼 또 무겁지만 초입에는 저런 말이 또 어울리지 않는가,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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