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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on Mar 07. 2021

스스로를 파괴하는 인간성에 대해, 작은 것들의 신

인간성을 만드는 하나의 체계, 인간을 외면하는 체계가 이끄는 비극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은 나에게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관습과 그 줄기로 이어지는 수 많은 억압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관습이 무조건적으로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관용과 그에 부합하는 또 다른 가치들이 부족한 사회에서는 개인의 인간성 그 자체를 말살하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내가 자유론을 읽고, 인간과 사회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억압이라는 주제의식을 깊이 이해하고자 하면서 어쩌면 가벼운 마음으로 소설 책인 '작은 것들의 신'을 만난 것은 정말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번 글을 통해 '작은 것들의 신'이라는 책 그 자체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작은 것들의 신'이라는 소설에서 얻은 나만의 소회를 나만의 개인적인 경험과 사유로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도전처럼 풀어나가볼 생각이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1960년대 인도는 가부장적 사회상과 카스트로 인해 계층(여성과 남성, 성인과 아동, 가촉민과 불가촉민 등)간 위계가 뿌리 깊게 자리한 시대였다.

이 책의 저자인 아룬다티 로이는 주인공인 쌍둥이 어린아이들의 시점에서 우열의 관계로 정립되어지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수 많은 이해관계와 조건들이 궁극적으로는 그 개인들을 어떻게 파멸시키는가를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읽어내려가면서 작가가 '대칭'이라는 도구로 이 책의 주제의식을 강화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근본적으로, 앞에서 설명했던 성별, 연령, 계급을 포함하여 인종(백인-인도인(구체적인 인종에 대한 언급이 없음으로 국적으로 갈음)), 국가(영국-인도), 언어(영어-말라얄람어)에 대한 이야기 속 개인들의 뿌리깊은 우월의식과 열등의식이 이 소설의 긴장과 사건을 이끌어가는 주요 원동력 같다는 느낌이랄까.

소설 속의 그러한 사회상이 너무나도 비인간적이라고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소름 돋을 정도로 인간적이라고 느껴졌다. 


종교, 이데올로기, 정치와 같이 근본적으로는 인간 이상(ideal)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갖고 작동하는 수 많은 체계들이 종국적으로는 그 체계의 조물주인 인간 자신을 파괴하고, 그것을 공고히 하는 관습화에 대해 위와 같은 양가적인 감정을 느낀 것 같다. 


어느 사회건, 개인이 각자의 목적과 이해관계, 또는 선택할 수 없는 운명에 따라 특정 집단에 속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회를 구성하는 집단 간의 거리가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그리고 그 거리는 결국 횡적으로 멀어지다가 결국에는 중력을 잃고 종적으로 위치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 이미 기울어진 그 체계 안에서는 개인의 온전한 자유를 보장하지 못한다. 

마땅히 사랑하고 또 사랑받을 자유, 같은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자유, 자신들의 능력을 공적으로 인정받을 자유와 같은 것들이 말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보자. 

결국,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각기 다른 비극을 맞이 한다.

모두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었다.

그 중에서 개인적으로는 자기 자신과 세상을 잃어버린 채 함구증에 걸려 동네를 배회하는 에스타의 case가 가장 가슴이 아팠다. 

어린 쌍둥이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수 많은 이야기들은 그 자체가 날실과 씨실로 이루어진 비극이라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고 종국적으로는 파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마치 사냥감을 포착한 말벌처럼 지독하게 따라 다니던 그 피할 수 없는 비극은 어떠한 악한 의도도 없던 어린 쌍둥이에게 가장 아프게 침을 놓고 사라진다. 그들이 사랑하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비극을 선사하기 위해.


이처럼 이기적인(또는 무능력한) 어른들이 만들어낸 비극적인 체계는 결국에는 그 체계에 어떠한 기여나 의도도 갖지 않은 약하고 순수한 존재들부터 파멸해나간다.


나는 아나키즘이나 체계의 해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인간을 인간 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인간을 만드는 사회화와 서로를 향하는 유대적인 체계가 절실하다.

아무리 이상적인 체계라도 양극성은 존재할 수 밖에 없는 법이다. 

하지만 그 양극성의 괴리를 좁히기 위해 제도적 노력이나 자성이 기능하고 있느냐는 것은 또 다른 말이다.


나는 인간에게 있어 사회화(socialization)는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는 모든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산부의과 의사와 간호사 손에 들려 나오는 그 순간부터 인간은 타인의 손과 눈 빛으로 길러질 수 밖에 없는 존재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순수한 자신만의 노력으로 이 세상에 그 어떠한 생각이나 결과물을 창조해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구성하는 사회와 관습, 체계는 매우 중요하다.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미시체계(가족, 친구 등)부터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시체계(문화, 관습, 해당 사회에서 시대를 거듭하며 전수되는 행동양식 등)에 이르기까지.

브론펜브네너만의 생태체계이론(ecological system theory)

의외로 우리의 행동양식과 사고양식 즉, 도식(schema)은 미시체계보다 거시체계에 더욱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것과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이 모든 사유의 끝에서 결국 모든 인간은 자성과 정치적인 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은 나의 결론에 '작은 것들의 신' 다음으로 읽고 있는 '한나 아렌트의 말'의 저자인 한나 아렌트의 너무도 유명한 '악의 평범성'을 인용하고자 한다.

타인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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