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oon Jun 10. 2021

무의미함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

무의미의 축제 - 밀란 쿤데라

무의미함과 보잘것없는 것을 사랑할 수 있을까?


옛날이야기로 시작을 해보려 한다.

내가 고등학생이던 때, 호텔 서빙을 시작으로 엑스트라, 카페, 콜센터, 피시방, 자동차 제조, 핸드폰 수리, 무대 설비 등 다양한 업종에서 아르바이트를 경험했다.

돈을 버는 것이 물론 주된 목표였지만,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뒤로 빠져있기보다는 항상 앞장서서 열심히 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던 기억이 있다.

어떤 영역에서든 나도 남들처럼, 아니 남들보다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에 의미를 두었던 것 같다.

이런 면에서 의미부여라는 것은 카페인 같은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무엇을 하든, 그 일에 의미를 둔다면 목적지까지 걸어갈 것을 뛰어가게 해 주니까.


대학생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남들보다 일찍 군대를 갔고, 군대에서도 내 역할에 대한 애착이 있었는지 몰라도 위에서 시키는 것에 요령 없이 꽤나 성실하게 임했다. 그래서인지 꽤나 많은 포상휴가를 받았고, 전역하기 전까지 매달 포상휴가를 나가곤 했다.

비록 군대에서 허리를 다쳤고 반년 넘게 진단도 제대로 못 내린 군의관 덕분에 주기적으로 척추에 신경주사를 넣어줘야 하지만 어쨌든 남 부끄럽지 않게 국방의 의무를 마쳤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통증과 서러움을 억누른다.

어떤 면에서 의미라는 것은 나름의 안정제 같은 것이란 생각이 든다.


복학을 해서는 학생회장, 국가근로, 세 번의 해외봉사, 국내 봉사, 실습 그리고 졸업하고 나서는 정신건강 수련과 아르바이트, 취업까지.

남들도 다 이만큼 한다지만, 나 역시 나름의 의미를 쫓아 달린 이 길이 부끄럽지는 않다.

누구든지 그들 자신이 하는 일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 그 의미를 쫓아 최선을 다했다면 아마 부끄러움은 없을 것이다.


의미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요동치는 망망대해 같은 현실 위에 부유하는 한 없이 가벼운 나라는 존재가 잠시 흔들림을 멈추고 중심을 잡도록 도와주는 닻 같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든, 어떤 삶을 살았든, 어떤 선택을 했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든 타인에게 “왜?”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그 나름의 의미를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의미라는 것은 인간 존재의 개별성과 인간 사회의 보편성을 지탱하는 기둥이 되기도 하고, 한 없이 작고 미세한 것에도 부여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면에서 ‘호모 사피엔스’를 다르게 해석하면 ‘의미를 찾는 사람’이라고 읽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의미라는 이름의 환상


언제부터일까.

어디를 가든, 조금은 특이한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나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그런 나의 개별성이 지금 나와 마주한 또 다른 개별성과 충분히 섞이지 못한다는 불편함이 뒤따랐다.

그럴 때마다 내 나름의 의미를 납득시키고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최근에서야 그러한 노력을 비교적 덜 하는 편이다.

나름의 의미나 개별성은 ‘나름’의 형태로 존재하는 법이니까.


역사 속 서로 다른 지점에 세워진 전망대에서 사람들은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한다.

당신과 나는 서로 다른 지점에 서 있고, 그것은 우리가 같은 목표를 향해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나의 부모, 나의 형제, 나의 배우자나 나의 자식들마저 우리의 공통점은 인간이라는 종족적 특성 말고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구태여 남들과 같아지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다르게 보이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다.


내가 해내는 일에 어떤 의미를 찾아 헤매다 보면 부질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기어코 나름의 의미를 찾아내어 부질없음에 국소마취제를 밀어 넣고 만다.

각성제처럼 쓰이는 이 의미는 거창하게 부풀어 오르기 쉽지만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 역시 본질의 의미라는 것은 불문곡직 존재하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 의미는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새벽잠 속에서 나를 일으켰던 그 나름의 의미들 없이 하루를 각성하고 보낼 수 있었을까? 내가 과연 무의미함을 사랑할 수 있었을까?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서도, 참혹한 전투 속에서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나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 무의미함 속에 유영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아름다운 무의미를 들이마셔 보자.

그리고 나를 움직이는 어떤 의미도 없이, 나는 본질적으로 비루한 존재라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위대함과 마찬가지로  사랑하자.


보잘것없다는 건 여자를 자유롭게 해 줘. 조심하지 않아도 되게 해 주는 거야. 재치 있어야 할 필요도 전혀 없어.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의미를 찾아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그 의미를 놓쳐 절망하는 사람들에게도 자유롭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내 나름의 소소한 의미들을 찾아 나서는 것에서 자유롭기를 바란다.

어쩌면 그러한 의미 없이도 나라는 존재, 내가 하는 일들을 본질적으로 사랑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작가의 이전글 스스로를 파괴하는 인간성에 대해, 작은 것들의 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