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밀린 숙제가 있다. 묻어둔 꿈이요, 갚아야 할 빚이기도 하다.
성직자가 되겠다고 신학교 문을 두드렸다. 소명의식 에서였지만 열아홉의 나이에 감정의 작용도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으리라. 그럼에도 세속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이 몸에 밴 학생이었음을 돌아본다. 정해진 기숙사 방에는 규정대로 선배들과 함께 지내도록 했다.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선배들의 조언을 들었다. 교수님들도 문학, 역사, 철학에 관련된 책들을 추천했다. 나는 주로 문학 쪽에 더 관심을 갖고 독서를 했다. 이광수의 「사랑」과 「흙」. 「대지」, 「전쟁과 평화」, 「그리스인 조르바」, 「데미안」, 「주홍 글씨」, 박계주의 「순애보」.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거라」,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시간이 지나서 「삼국지」, 「지리산」, 「토지」, 「아리랑」, 「태백산맥」 등을 읽은 기억이 있다. 셰익스피어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목록이다. 한 번은 여름날 서재에서 소나기가 내리는 것을 모르고 독서하다가 마당에 널어놓은 곡식을 젓게 한 일로 부모님의 핀잔을 들었던 일이 추억의 장에 남아있다. 스무 살 전후에 읽었던 책들은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두뇌의 다락 속에 잠재력으로 담겨있다는 생각이다. 교양과목 위주의 1학년은 커리큘럼에 따라 열심히 배움에 힘을 기울였다.
2학년 2학기를 맞게 되면서 방황의 계절이 슬며시 내 곁에 다가왔다. 어쩌면 소명에 대한 물음부터 꼭 가야 할 길인가 하는 진로문제까지 답을 찾으려는 몸부림이다. 이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혼자만의 비밀처럼 매우 힘든 싸움을 하는 갈등이었다. 회중 앞에서는 전혀 아닌 척하는 위선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 중에도 용감하게 신춘문예에 투고하기도 했다. 옛 얘기다. 펜으로 쓴 원고지를 봉투에 담아 시골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 본사 정문을 찾아 직접 접수한 일이 있었다. 결과는 소리 없는 메아리였지만. 3학년을 시작하면서 마구 흔들리는 나를 돌아보며 허공에다 자퇴원서와 복학원서를 썼다, 지우기를 수 없이 반복하였다. 우선 돌파구를 찾는 중에 길이 보였다. 마침 가을에 입대하라는 소집영장이 배달되었다. 휴학계를 제출했다. 일탈의 기회가 되려나 하는 호기심으로 추석을 며칠 앞두고 훈련소에 입소하여 푸른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어쩌면 외줄 타기 인생의 훈련장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비끗하여 줄에서 떨어지면 여지없는 광대가 되고 만다는 생각의 짓누름이 있음이다. 하지만 줄에서 떨어지면 큰일이라도 날 것으로 여겨져 악착같이 줄을 두 손으로 꼭 잡고 놓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내 모습이 안정을 찾았다는 것은 아니다. 흔들림에 맡기고 싸우며 동행하는 것이려니 생각할 따름이 아니었나 싶다. 꺾이지 않으려고 억지를 부리려다가 부러지면 더 이상 진행이 될 수 없을 테니까. 훈련소에서 기초 훈련, 특수학교 과정을 거쳐 육군대학교로 근무지가 결정되었다. 근무 중에 나에게는 또 다른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베트남 파병이라는 새로운 명령이다. 그야말로 자의 반 타의 반이다. 파병 초창기 때는 할 수 있으면 기피하려는 경향이 많았다. 그래도 전쟁터가 아닌가? 전쟁은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과 사의 갈림길이 있는 곳이다. 가족들이 만류했으나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있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나는 가기로 결정했다.
부-웅, 부-웅, 육중한 미군 수송선인 LST가 둔탁한 엔진소리를 내면 부두를 밀어낸다. 서서히 움직이는 배를 향해 손을 흔들고 그들을 내려다보며 들을 수 있으려니 생각하며 큰 소리로 연인의 이름을 부르는 얼굴도 있다. 거리가 점점 멀어져 부산항 제3 부두가 작은 점으로 보일 때까지 갑판을 지키며 다짐한다. ‘배를 타고 가서 배를 타고 돌아오자는 무언의 약속’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만약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하거나 전사를 하면 비행기로 조기에 귀국하게 된다. 그러니까 살아있어야 배로 올 수 있다는 의미다.
5박 6일의 항해 끝에 맹호부대 주둔지역의 항구에 닻을 내렸다. 8월에다 열대지역이기에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굉장하다. 곧 배치받은 부서 참모를 비롯하여 선임들에게 신고를 했다. 다른 두 병사와 나 셋이 함께 했다. 사단 사령부 내무반에서도 인사를 했다. 자리를 잡고 첫 밤을 청했다. 멀리서 가까이서 들리는 포성 소리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미 익숙해진 병사들은 개의치 않고 깊은 잠을 자고 있다. 코를 골기도 한다. 다음 날부터 나도 익숙해져 그러려니 하며 잠을 잘 잤다. 여원이라는 월간지에 전선의 소식을 보낸 것이 소개된 적이 있었다. 서울을 비롯하여 여러 지역에서 날아오는 편지에 답장을 쓰는 즐거움을 경험했다. 한 편 1년 동안에 많은 사고와 여러 죽음을 현장에서 듣고 보았다. 전사자 못지않게 의외의 사고로 죽음에 이르는 안타까운 일이 있음이다.
약속이 지켜져 배로 귀국하게 되었다. 방황의 흔들림도 정리가 되었다. 다시 2학기에 맞춰 복학을 했다. 월간 잡지 이름은 잊었지만 짧은 글을 보냈는데 황금찬 시인이 채택하여 피드백과 함께 실린 적이 있고 나선 쫓기는 시간 속에 글쓰기를 멈추고 긴 동굴 속에 숨게 됐다.
45년 목회의 길을 정리하고 은퇴하다. 머리를 움직이는 일을 했으니 몸으로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자원하는 후배 세 사람과 함께 미용실 원장에게 커트의 기본을 배우기로 하다. 원장도 1주일에 한 번씩 무료로 가르쳐 주기로 했다. 이발기를 비롯하여 가위, 가발 등 모든 준비를 하고 시작했다. 배운 다음 요양원을 방문하여 어르신들의 머리를 다듬겠다는 계획이었다. 준비 기간을 1년 예상했으나 6개월이 지나 소문을 들은 요양원에서 요청이 왔다. 우리는 사양했으나 미용실 원장이 쉬는 날 같이 참여해서 마무리를 해 주겠다 하여 용기를 갖고 시작을 했다. 의외로 반응이 좋았고 봉사하는 이들도 도움이 되겠다 하여 계속하였다. 정해진 몇 군데의 요양원을 한 달에 한 차례 방문하기로 약속하여 실시하던 중 코로나19로 인해 잠시 쉬게 되었다.
후배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내가 살면서 들은 기막힌 사연이 있는데 누군가가 기록해서 세상에 알렸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다.
“나에게 그런 글재주가 있어야지요.”
“아니오. 선배님은 쓸 수 있습니다.”
망설이는 나에게 장례식 얘기부터 꺼낸다. 연락을 받고 가보니 단간 방에서 아들 혼자 엄마의 시신을 지키고 있었다. 잠시 있으려니 아들 친구 하나가 왔다. 셋이 방을 지킨다. 후배가 장의사에 연락을 하니 특별한 연고가 없으면 당일로 장례를 하라는 것이다. 장의사 차가 오기로 한 사이 후배는 어깨너머로 본 상식을 발휘해 엄마의 입은 옷 그대로 염을 했다. 오전에 별세한 분을 오후에 보내는 것이다. 장의사 차가 도착했으나 관을 옮길 사람 하나가 모자랐다. 고민하던 후배는 염치 불고하고 장의사 차 운전기사에게 사정을 말하고 함께 운구를 했단다. 어쩌면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벽제 화장장으로 달려가서 화장을 하고 한 줌 가루가 된 고인의 65년 삶의 흔적이 아들의 손에 의해 산 곳곳에 뿌려졌다. 난 즉시 메모장을 열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1920년 황해도에서 태어나다. 이름은 모름. 다만 00 엄마로 알고 있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일본 본토 군수공장으로 끌려가다.
해방이 되어 돌아왔으나 이미 금이 간 그릇으로 기피의 여인이 되다.
씨받이로 첫 번째 남자를 만나다. 아들이 아닌 딸을 낳았다 하여 딸을 뺏긴 채 쫓겨남.
1.4 후퇴 때 남쪽으로 오다. 포천에 자리 잡다.
장애아들을 둔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 두 번째 남자의 아내가 되다. 두 번째 남자 죽고 장애 아들은 결혼하고 독립하다.
53-4년쯤 흑인병사와 동거 아들을 낳다. 혼혈아는 따로 나가서 연락이 끊기고 병사는 말없이 귀국하다.
ㅎ중사와 살림을 시작하다. 55년에 아들을 낳아 00이라 이름을 짓고 엄마의 성을 따라 주민등록을 하다. 중사는 네 번째 남자다. ㅎ중사는 다른 부대로 전출하며 연락이 두절되다. 발 뿌리에 걸리는 돌멩이처럼 이리저리 차인 한 여인의 한을 알려야 할 숙제가 나에게 주어졌다. 후배에게 해보자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나는 고민에 빠졌다. 한을 풀어줄 수 있는 글을 쓸 실력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문예창작학과에 등록을 했다. 조금 늦더라도 배우면서 글쓰기 하려는 각오다. 비록 여러 면에서 무뎌진 것을 느끼지만 최선을 다하자. 밀린 숙제를 풀지 않고 두면 그대로 있을 뿐이다. 숙제를 하게 되면 고인에게 와 후배에게 진 빚을 갚는 셈이다. 나에게는 묻어두었던 꿈을 이루는 게 아닌가. 그냥 앉아 있다가 막이 내리기를 기다리지 말고 일어나 꿈을 향해 힘차게 도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