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두 차례 만나 점심식사를 함께 하는 고등학교 동기가 이웃 아파트에 살고 있다. 시내버스를 타고 가기에는 가까운 거리다. 대체적으로 운동하는 셈 치고 걸어서 가는 쪽은 나다. 하기야 메뉴 판에 더 다양한 음식을 선택할 수 있는 유리한 면도 있기 때문이다. 밥값은 번갈아 가며 부담 없이 지불한다. 한 번이라도 차례를 어기고 내가 냈다 하면 자꾸 전화해서 갚아야 한다며 재촉한다. 언젠가 한 말이다.
"떠날 때 빚지고 가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무슨 빚이오. 한 끼 밥값 누가 내면 어떻소"
무심코 주고받은 말인데 지금 생각하니 떠날 준비를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하긴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기도 하다. 6월 중순 경 옛날 육개장을 함께 먹고 헤어진 후 만날 기회를 갖지 못했다. 8월 2일 이른 아침 C군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B군의 상태가 좋지 않고 외출이 어렵다 하니 한 번 방문합시다"
"그렇게 합시다. 어디서 만날까요?"
"12시 30분. 1호선 전철 부평역에서 만납시다."
"시간에 맞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갈비탕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나서 택시를 타고 B군이 살고 있는 아파트 문 앞에 도착했다. 문은 이미 열려있었다. B군의 부인이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리는 중이다. C가 오면서 방문하겠노라고 연락을 했었나 보다. 아들과 같이 투병 생활 하는 남편, 아버지를 간호하기에 고생을 많이 하는 얼굴들이다. 속옷만 입고 있는 친구를 보니 팔과 다리 근육이 거의 빠져나가 어린아이처럼 가냘픈 모습이다. 너무 서글픈 생각이 든다. 건강을 위해 등산을 하고 공원 산책을 규칙적으로 하던 모습이 그리워진다.
B군에게서 희귀 암이 발견된 것은 2 년 전이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항암치료를 받았음에도 달리 변화가 없이 악화되어 나락으로 기울어진다. 딸과 사위가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며 최선을 다하였음에도 회복에서 멀어져 가니 할 수없이 집에서 요양하게 됐다. 속히 일어나 다시 만나기를 바라면서 친구의 손을 잡아줬다.
8월 19일 오전 8시. 벨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전화기가 나를 부른다. B군 부인의 음성이다.
"남편이 1시간 전 아침 7시에 별세했다며 울먹인다."
"고생을 많이 하고 떠났네요. 친구 병 간호 하기에 너무 수고하셨습니다. 곧 들리겠습니다."
C군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후 1시 장례식장에서 만나기로 하고 전화기를 닫았다.
장례식장에는 내가 먼저 도착했다. 고인 영정 앞에 서서 머리를 숙였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을 같은 교실과 운동장을 오가며 우정을 쌓았던 착한 친구는 은행에 취직이 되어 성실함을 인정받았다. 서로 길이 달라 흩어져 살다가 1980년 가을 인천 지역에서 일을 하게 되어 교제가 계속 이루어지게 됐다. 잠시 후 도착한 C군은 가족과 인사를 나눈 후 친구와 자전거를 타고 학교 다니던 추억을 떠올리며 옛정을 그리워했다. 아내와 1남1녀를 사랑하던 남편 그리고 이버지는 80년의 여정을 끝내고 쉼의 나라로 떠났다. 보내는 가족들은 더 머물게 하지 못한 이쉬움의 눈물을 삼키며 고인의 뜻을 이어가기로 다짐을 하다.
전화벨이 벋으라고 재촉한다. 요즘 내가 전화하는 걸 잊었더니 그래서 전화를 하는 건가? 무슨 일인가? C군으로부터 온 전화이기 때문이다.
"친구. 집 사람이 오후 1시 30분경 떠났어, 별세했어."
"친구여 그동안 고생 많이 했습니다, "
중학교 교사로 정년퇴직을 하고 서양화를 배우며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었다. 남편은 정년이 없는 사업을 계속하므로 경제적으로 여유도 있어 근심딜 일도 없었다. 그런데 5년 전 건강검진에서 폐암 진단을 받아 남편을 비롯 딸과 두 아들의 걱정이 되었다. 몸에 질병이 오지 못하도록 예방을 해도 찾아오는 질병을 뿌리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몸에 병이 오면 치료를 받아 나아지는 것보다 대체적으로 더 악화되는 경우가 많다. C군의 부인도 폐암 진단이 나온 후 점점 상태가 좋지 않게 진행이 됐다. 폐에 물이 차서 호흡 곤란이 오면 견디기가 너무 힘들다. 병원으로 달려가 조치를 취한 후 집으로 돌아온다. 얼마나 지치는지 (당한 자만 알 수 있음) 말로 표현하기에 부족하다. 최근에는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했으나 차도가 없어 그냥 퇴원 집에서 가족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역시 가족들의 고생이 무척 어렵다. 아내를 일으키고 눕게 하는 일, 몸을 씻기는 일 등온 혼자서는 벅찬 일이기도 하다. 딸과 아들들도 고생을 하면서도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며 엄마를 위해 땀을 쏟는다. 더 머무르기를 바라는 마음도 뿌리치고 사랑하는 아내, 그리운 엄마는 76년의 나이테를 긋고 정든 가정을 떠나게 되었다.
나는 아내에게 B군 부인에게 별세 소식을 알리라고 일렀다. B군 부인에게는 같이 모임을 갖다가 2020년 2월에 별세한 D군의 부인에게 알리라고 하면서 연락이 되면 오후 시간을 내어 장례식장에 세 가정이 함께 다녀오기를 의논하라고 했다. 마침내 의견이 모아졌다. B군 부인과는 부평역에서 오후 3시에 만나 구로에 있는 KU병원에 가기로 하고, D의 아내는 이천 쪽으로 외출 중인데 병원까지 직접 오기로 했다.
장례식장에 도착하여 조문을 하고 아내를 떠나보내는 C군의 심정을 헤아려 본다. 먼저 남편을 보낸 B군의 부인 말도 듣는다.
"낫지 않고 고생할바엔 보내주는 게 나은지도 모르겠어?'서로가 너무 힘이 들어요." C의 말이다.
"그렇게 자기만 알던 야속한 남편임에도 해질 무렵이면 곧 문을 열고 들어 올 것만 같아요." 자칫 우울증에 걸릴 듯싶어요." B군 부인의 말이다. 그러나 저러나 떠나는 자는 말없이 내려다보고만 있겠지. 보내는 마음은 접어두고서.